“2차 피해 우려 등 법정 변화
감시자 중요성 절실히 느껴”
eNd팀 회원들이 지난 5월1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재판 방청 후 법원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가해자들에 대해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eNd 제공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른다. 서로 아는 것이라곤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범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는 점뿐이다. ‘eNd팀’(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은 지난 3월부터 서울, 대구, 춘천 등 전국에서 열리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을 방청하고 후기를 작성한다.
조주빈의 검거 100일을 하루 앞둔 지난 22일 수원지법에서 eNd팀 활동가 ‘발바닥’과 ‘우주’를 만났다. 수원지법 형사9단독에서는 n번방 사건 주요 관련자인 ‘흑통령’ 신모씨(32)와 ‘와치맨’ 전모씨(38)의 공판이 잇달아 열렸다. 20석 규모 방청석이 가득 찼다. 기자와 변호인단을 제외하고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청객들의 펜이 바쁘게 움직였다.
변호인은 신씨가 소지한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1260여건 중 410건의 경우 ‘아동·청소년임이 명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재판장 박민 판사는 증거조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우려했다. 박 판사는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증거조사는 조심스럽고 민감한 사안이다.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비공개로 진행할까 한다”며 변호인과 검사의 동의를 구했다. 박 판사는 검찰 측에 “다음 공판기일까지 반드시 피해자 국선변호인과 연락해 동의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당부했다.
발바닥은 “판사가 다른 재판에 비해 2차 피해를 걱정해 변호인과 검사 의견을 묻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에서 피해자 보호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우주는 지난달 14일 조주빈 공판을 사례로 들었다.
“피해자 변호사는 피해자가 언론 보도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으니 피해자의 가명도 언급 자제해 달라는 의견을 냈어요. 판사는 ‘내가 기자들에게 가명을 쓰지 말라고 강요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죠. 피해자 측의 절박한 요청이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에 화가 났습니다.”
이들이 eNd팀에 합류하게 된 건 n번방 사건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다. 우주는 “여태까지 정말 많은 여성 혐오와 성착취 사건이 있었지만 ‘정말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 건 처음”이라고 했다.
지난 3월31일 춘천지법에서 열린 ‘로리대장태범’ 배모씨(19)와 ‘슬픈고양이’ 류모씨(20) 공판을 시작으로 eNd팀은 “셀 수 없이 많은” 재판을 보고 듣고 기록했다. 낯설고 어려운 법률용어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우주가 말했다. “처음에는 뭐가 중요한지 몰라서 변호사 이름까지 받아적었거든요. 핵심 내용만 작성하는 법을 조금씩 습득했어요. 어려움보다는 뿌듯함이 큽니다.”
피고인 측의 변명을 들을 때면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구나’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나도 박사에게 협박을 당한 피해자다”(부따) “피해자와 피고인은 호감이 있던 사이다”(거제시청 공무원)…. 가해자 대부분은 방청석 쪽으론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 우주는 “피해자를 그렇게 많은 시선 속에 가둬놓고 자신은 버거워하는 게 어이없기도 하다”고 했다.
방청 연대를 이어갈수록 감시자의 중요성을 체감한다고 했다. 발바닥은 “한 재판장은 재판 시작 전 ‘오늘은 방청석에 사람이 많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며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판검사들이 사건을 잘 모르고 기소하거나 선고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판사도, 검사도, 가해자도 감시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느낄 때면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방청석을 메운 다른 연대자를 보면서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우주는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해 싸우는 다른 이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