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원시시대의 유적들이 상당히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울산 태화강 상류의 반구대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는 정확한 연대를 모르지만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까지 오랜 기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에서 암각화가 더 발견되는데 여러 곳의 암각화 중 반구대 암각화가 가장 보존상태가 좋고 규모도 높이 4m, 폭 10m로 크다.
반구대 암각화의 주인공은 역시 고래이다. 고래가 새겨진 암각화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새겨져 있는데 거대한 귀신고래가 눈에 띈다. 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울산 앞바다에 고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고래잡이가 금지되어 있지만 종종 고래가 그물에 걸린다.
암각화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패턴이 독특하다. 뼈대만 보이는 게 X레이 사진 같다고 해서 ‘X레이 기법’이라고 말한다. 이 기법은 저 멀리 호주의 암각화에서도 발견된다. 호주와 한반도의 암각화 기법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두 문명이 하나의 종족에서 분리되었거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암각화에는 고래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물과 사람 등 170여개의 생물이 새겨져 있다. 이를 보면, 이 그림은 이 일대에서 살았던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자가 없던 시절 유일한 기록 수단은 그림이었다. 그림은 글과 달리 즉각적 소통이 가능하다. 구석기 시대와 현대는 말과 문화가 크게 다르지만 그림을 통한 기록과 소통은 여전히 중요시된다. 사실 미술가와 디자이너도 근본적으로는 그림 기록자이다. 특히 디자이너는 반구대 암각화처럼 생활 기록자에 가깝다. 그림 기록이 유지되는 덕분에 수만년 전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태화강 상류는 댐 건설로 1년 중 3분의 1이 물에 잠긴다. 이 때문에 암각화의 훼손이 심각하다. 많은 학자들과 시민단체가 이 암각화의 보존에 힘쓰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부재한 상황이다. 지금도 서서히 또 하나의 소중한 기록이 사라지고 있다.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