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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 복무, 일제 침략전쟁 협력…‘전쟁 영웅’ 백선엽의 그늘

  •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군사편찬연 자문위원장으로

6·25 기록에 큰 영향력 행사

“전공 다시 평가해야” 주장도

백선엽 장군 빈소 찾은 노영민 실장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왼쪽에서 세번째)이 12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선엽 장군의 빈소를 찾아 유족들과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노 실장.  연합뉴스

백선엽 장군 빈소 찾은 노영민 실장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왼쪽에서 세번째)이 12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선엽 장군의 빈소를 찾아 유족들과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노 실장. 연합뉴스

100세를 일기로 지난 10일 사망한 백선엽 전 육군 대장은 1920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그는 일제 꼭두각시였던 만주군에 복무했으며 나중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백 전 대장은 1943년 2월 만주 간도성 명월구에 있던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탄압하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돼 해방될 때까지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활동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그는 생전에 이에 대해 공개 사과한 적이 없다.

그의 한국군 근무는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 임관 후부터 1960년 대만 주재 대사로 임명되기 이전까지 14년 정도다. 6·25전쟁 당시 제1사단장이었고, 1953년 한국군 최초 대장으로 진급했을 당시 33세였다.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캐나다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1949년 2월 좌익·공산 세력 숙군을 지휘하던 그는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체포된 후 사형이 구형된 박정희 소령을 구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그를 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으로 보냈고, 1969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했다.

백 전 대장은 전역 후 30여년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지내면서 6·25 전사 기록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백 전 대장 사망을 계기로 제대로 된 6·25전쟁 전사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백 전 대장이 대표적 전공이라고 내세운 다부동전투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낙동강 전선 240㎞는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즉 8개 사단이 합심해서 방어해낸 것으로, 누구 한 명의 영웅적 행동으로 지켜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 당시 보수 세력들의 추대로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5성 장군)가 될 뻔했으나, 6·25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군 원로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우리 군의 건군이념에 배치된다’며 청와대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전달해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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