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뉴딜’의 적절한 우리말은 ‘녹색성장’이다. 도대체 녹색성장이 뭔지 정의를 좀 알려달라고 하는 요구에 정부가 설명만 몇 년을 했어도 이해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답변으로 일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좋아지나 했더니, 그 무개념의 단어를 영어로 바꿔놓고 마치 혁신이 일어날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녹색’ 포장지가 ‘그린색’으로 바뀌면 혁신이 되는 이 아이러니의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차라리 알려 하지 않는, ‘명약’의 처방이 필요해 보이지만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정보홍수시대에 이 약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기란 보통사람의 의지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지금은 1년, 아니 불과 몇 개월 만에라도 세상이 개벽하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예측불가’시대에도 우리나라에서 나타날 명백한 것들은 몇 가지가 있다.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확실한 최악의 미래로는 과거에 예측한 가장 심각한 온도상승 시나리오보다 온도가 더 빠르게 올라가는 ‘폭염재난시대’를 마주했다는 것과, 이제는 성장을 이끌 연령대의 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인구절벽시대’를 맞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언택트사회’가 고착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린 뉴딜을 발표하려 했다면 이 몇 가지 예측 가능한 명백한 미래상황을 주시하고 최대한 이 상황들을 늦출 수 있는, 그리고 이 상황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방향이 제시되었어야만 했다.
이 몇 가지 확실한 미래상황이 가리키는 핵심은 이제 더 이상 물질만능의 성장주의가 아닌, 안정적 축소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린 뉴딜의 목표는 미래의 인구절벽에 따라 밑그림이 그려져야 했으며 궁극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위한 혁신이 따라와야 했다. 폭염재난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에너지의 절대적 사용량을 어떻게, 어디까지 줄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했지만, 목표가 없는 전환사업들로만 채워졌다. 세 가지 경제전환 모델인 그린리모델링과 그린에너지전환, 친환경 모빌리티사업은 어느 정도 용인 가능한 각론 수준의 사업들로는 보인다. 다만 궁극적 목표가 없는 각각의 사업들은 난잡해 보일 뿐이다.
가장 많은 예산이 집행될 친환경 모빌리티사업을 보자. 디지털 뉴딜의 방향과 미래사회는 분명 우리 사회의 이동 자체가 급격히 줄어드는 ‘디지털 근대’사회로의 돌입을 그리고 있다. 편안하고 안전한 집 자체가 휴식공간이자 일터가 되는, 100년 전 도시계획가들이 꿈꾸었던 가장 이상적인 도시구조인 ‘직주근접’의 시대가 미래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은 폭염재난의 기폭제인 화석에너지와 핵발전의 유지를 전제하고 있다. 화석에너지가 아니면 핵발전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수소자동차가 왜 아직까지 미래산업으로 포장되고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전기에너지로 물을 분해해서 다시 전기에너지를 얻겠다는 이런 약장수 같은 말을 위해, 일자리는커녕 설치비 이자도 감당 못하는 충전소를 위해 수십조원을 투입한다는 데 어떻게 박수를 칠 수 있겠는가? 이번 그린 뉴딜 발표는 순전히 혁신에서 밀린 한 대기업의 연명을 위해 세금을 투입하겠다는 쇼케이스로밖에는 비춰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