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대법정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 연방대법원의 최고령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7)는 세계적인 뉴스메이커다. 지난 13일에도 그가 5번째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소식에 수많은 미국인이 애를 태웠다. 이틀 후 “나는 여전히 일할 수 있다”고 개인성명을 낸 뒤에야 지지자들은 안도했다. 기득권을 깨는 기념비적인 판결들을 내놔 ‘노토리어스 RBG’(악명 높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그는 약자와 진보를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때 역대 두번째 여성 대법관이 된 후 그는 남녀차별 철폐와 장애인·성소수자 인권 옹호 판결을 이끌어내고 있다. 머그잔과 티셔츠 사진에도 등장할 만큼 미국에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대법관 구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오는 9월 퇴임하는 권순일 대법관의 후임 추천에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씨의 미국 인도 불허 판결을 한 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51만명을 넘었다. “시민들의 (대법관) 인사 검증이 필요하다”는 한 여성학자의 주장에 반응이 뜨거웠다.
하지만 후보자 추천 결과는 ‘서·오·남’(서울대 법대 출신, 50대 남성)의 추가였다. 추천위는 “사회적 약자·소수자 보호와 공정함을 실현할 능력과 자질,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통찰력과 사회의 다양성을 담아낼 수 있는 식견 등을 갖춘 것으로 판단되는 후보들을 추천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법관 이외 다른 이력을 가진 후보자도, 여성 후보자도 없었다.
미국의 대법관 9명 중 3명(33.3%)이 여성이다. 첫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2006년 퇴임)가 대법관에 임명된 것이 1981년이었다. 우리 대법관 13명 중 여성은 아직 3명(23.0%)에 불과하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입성이 2004년이었다. 사회적 약자와 젠더 이슈가 뜨거운 상황에서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북돋아야 한다. 서·오·남 안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과 구성원 자체를 다양화하는 것은 다르다. 긴즈버그가 말했다.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국은 시대의 기후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