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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기 세상’에 김해영을 보다

예초기(刈草機) 굉음이 들려온다. 산과 들, 숲과 공원, 둑과 길가에 예초기 칼날이 번득인다. 한순간 풀밭은 사라지고 풀비린내가 진동한다. 태양 아래 빛깔과 자태를 뽐내던 야생초들은 흔적도 없다. 예초기가 돌아가면 햇살이 튕겨나가고 여름마저 피멍이 든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멱을 감고 풀밭에 누워 뭉게구름을 보던 시절은 동요에나 남아 있다. 가축이 아닌 공축(공장식 축산)의 시대에 풀은 동물의 유용한 먹이가 아니다. 야생은 위험해졌다. 야생초들은 사나워져서 풀밭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와 노래가 흐르지 않는다. 사내들의 섬세한 낫질은 사라졌고 예초기 칼날만이 풀밭을 휘젓는다.

아파트 화단에 옥잠화 몇 그루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옥잠화가 눈인사를 나눌 정도로 자랐을 때였다. 아침에 보니 옥잠화가 무참하게 잘려나갔다. 누군가 예초기로 화단을 쓸어버렸다. 그럼에도 옥잠화는 다시 솟아났다. 한 달쯤 지나 예초기 소리가 들려와 쫓아나갔다. 경비아저씨에게 옥잠화를 살려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하지만 이내 단념했다. 긴 장화를 신고 굵은 땀을 흘리며 예초기를 돌리는 아저씨 표정이 평소와 달리 잔뜩 굳어 있었다. 감히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것저것을 살피며 조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모든 풀이 그냥 풀로만 보였을 것이다. 차라리 뿌리까지 뽑아냈다면 야생초들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뿌리가 있으니 다시 이를 악물고 자라난다. 삐쭉삐쭉 솟은 잎들을 보면 흡사 풀들의 아우성 같다. 이런 녹색 피바람이 서너 차례 지나가야 여름이 끝이 난다.

지금 우리 마을 주변은 온통 하얀 망초꽃 세상이다. 예초기가 쓸고 간 지 한 달도 안 됐건만 어찌 꽃대를 올려 저리 일제히 피어났는지 기이하다. 아마도 망초는 예초기의 습격 시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이를 계산해 부지런히 꽃을 피웠을 것이다. 식물도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세상에 반응한다. 곧 망초꽃들도 예초기에 잘려나가고 다른 야생초가 처서(處暑) 근처를 밝힐 것이다.

우리 사회도 예초기가 돌아가고 있다. 진영논리(논리 아닌 생떼라 하고 싶다)가 다양한 의견과 건전한 비판까지 밀어버리고 있다. ‘부대’와 ‘빠’들이 휘두르는 예초기에 금도와 상식이 찢기고 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살피거나 따져보지 않는다. 결론을 미리 내고 논리는 나중에 세운다. 먹물들도 편싸움에 가담해 시류에 둥둥 떠다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악담이 서로를 저주하며 썩어가고 있다.

김해영이란 정치인이 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바른말을 한다. 일면식도 없지만 그를 주시한다. 지난 총선에서 낙선했고, 민주당 최고위원 자리를 내놓으면 그를 자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예민한 현안과 쟁점에 대해 길게 보고 바르게 나가자고 당당하게 말한다. 정치판에 있어도 ‘정치’에 물들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은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했고 그동안 미래통합당의 비례용 위성정당 창당을 규탄했다. 이런 행보를 한 민주당에서 위성정당을 만드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총선에서 위성정당 참여를 비판하며), “추모와 피해자 보호라는 두 지점에서 일의 경중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피해자께 깊은 사과 말씀 드린다”(박원순 고소인을 ‘피해자’라 호칭하며).

당리당략이란 예초기에 김해영은 홀로 맞섰다. 쏟아지는 문자폭탄에도 의연했다. 그의 바른 소리는 예초기 굉음에 묻히지 않았다. 자신이 떳떳하기 때문이다. 그는 500번의 비행기를 타면서도 귀빈 의전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돌아보면 정치판은 여전히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개혁을 외치던 이들이 개혁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인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원칙과 신의를 버리며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원칙과 신의가 없는 힘은 정의의 칼이 될 수 없다.

김해영표 정치가 예초기에 잘려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몇 번 응원하고 싶었지만 이제서야 박수를 보낸다. 글밭에도 예초기가 돌고 있다. 갈수록 척박한 글밭에 그래도 글 한 줄 보태는 것은 김해영 같은 인물이 있어서다. 어디에 있든 정치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김해영이 다른 김해영을 부를 수 있다. 낙담하거나 변절해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도, 앞으로도 누군가는 김해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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