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인들은 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을 반겼을까

김향미 기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폭발참사 피해 현장을 찾아 베이루트 시민의 손을 붙잡고 위로를 전하고 있다. 베이루트|A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폭발참사 피해 현장을 찾아 베이루트 시민의 손을 붙잡고 위로를 전하고 있다. 베이루트|AP연합뉴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항구 폭발참사에 분노한 시민들이 6일(현지시간) 거리로 나와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틀 전 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장례식이 치러지면서 도시는 슬픔에 잠겼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피해 현장을 찾았다. 베이루트 시민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과 거부감에 마크롱 대통령의 방문을 반겼다.

6일(현지시간) 레바논 남부 클라야에서 이틀 전 베이루트 항구 창고 폭발참소로 숨진 이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클라야|로이터연합뉴스

6일(현지시간) 레바논 남부 클라야에서 이틀 전 베이루트 항구 창고 폭발참소로 숨진 이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클라야|로이터연합뉴스

도시는 슬픔 속에…“현 정권은 물러가라”

알자지라 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베이루트 곳곳에서 폭발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날 폭발참사 사망자가 157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도심 곳곳에 촛불을 켜놓고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폭발사고 초기 현장에 출동했다 목숨을 잃은 구급대원 사하르 파레스(24)의 장례식은 국영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파레스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헌신과 죽음이 알려지면서 파레스는 소셜미디어에서 ‘책임지는 지도자가 아무도 없는 레바논의 영웅’이 됐다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시위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폭발참사 피해지역인 제마이제 지역을 방문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마크롱 대통령이 나타나자 수백명이 몰려들었고, 그 자리에서 레바논 국민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한 시민은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레바논 정부에 돈을 주지 말라”고 외쳤고,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원조가 부패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후 시위대는 “혁명”“우리는 정권의 퇴진을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한 시위자는 “레바논 정부가 테러리스트들이다”라고 쓰인 종이를 들었다. 유리 파편과 건물 잔해를 치우던 시민들도 “이 나라는 망했다”고 외쳤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한 여성은 “당신은 군벌 정치인과 함께였다”고 소리쳤고 마크롱 대통령은 “저는 그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돕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 여성을 가볍게 포옹함으로써 위로를 전했다. 한 시민은 트위터에 “레바논 지도자 중 누구도 마크롱처럼 할 수 없었다. 약간의 희망과 위안을 느꼈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정치권과도 대화를 할 것이다. 그들에게 개혁을 제안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개혁하지 않는다면 큰 책임을 물일 것이다. 그대로 두면 레바논은 침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이루트 시민들의 마크롱 환호, 씁쓸한 이면

마크롱 대통령은 재난 현장을 수습하는 ‘국가 지도자’처럼 보였다. 마크롱 대통령은 베이루트 시민들에게 박수를 받았고 그를 향해 “당신 만이 희망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운동가인 카림 에밀레 비타르는 “우리가 마크롱 대통령에 환호한 이유는 그가 ‘레바논 정권’의 문제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나라 지도자들과 달리 정말 레바논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레바논인들은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꼬집으며 ‘레바논을 향후 10년 간 프랑스 보호령이 되게 해달라’는 온라인 청원을 벌이고 있다. 청원인은 “레바논 관리들은 나라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데 무능력함을 보여줬다. 실패한 시스템, 부패, 테러와 함께 국가는 거의 끝에 다다랐다”고 주장했다. 지난 5일 시작한 청원은 현재 5만7000여명이 동참했다.

1차 대전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오스만제국을 물리치면서 레바논은 1920년부터 ‘프랑스 보호령’이 된다. 1943년 독립 때까지 사실상 프랑스 지배를 받은 것이다.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어떤 나라에서도 프랑스 지도자를 이렇게 환영한 적은 없었다. 레바논인들이 마크롱 대통령을 환영한 것은 “레바논을 망친 정부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큰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외국 매체들은 전했다.

장기간 정국 혼란을 겪은 레바논에서는 올해 1월 하산 디아브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이 출범했지만, 경제 회복과 개혁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6일(현지시간) 시민들이 이틀 전 항구 폭발참사로 거리에 쌓인 건물 잔해들을 치우고 있다. 베이루트|EPA연합뉴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6일(현지시간) 시민들이 이틀 전 항구 폭발참사로 거리에 쌓인 건물 잔해들을 치우고 있다. 베이루트|EPA연합뉴스

사실 레바논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때도 프랑스는 유엔군 창설을 주도, 레바논 안정화를 위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냈다. 내전 때부터 시리아가 레바논에 군대를 보내고 내정 간섭에 나서자 레바논은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간 분쟁 등을 피해 레바논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했고, 현재 15만명의 레바논인들이 프랑스에 살고 있다.

마크롱이 베이루트에 간 까닭, 레바논 개혁?

다만 마크롱 대통령의 노골적인 행보에 비판도 나온다. 장 뤽 멜랑숑 좌파당 대표는 “프랑스가 레바논 정치에 간섭해선 안 된다”며 “레바논은 더 이상 프랑스 보호령이 아니다”고 말했다. 중동 지역에서 러시아와 터키가 영향을 키우는 상황에서 세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내세우기 위해 마크롱 대통령이 가장 먼저 베이루트를 찾은 것이라고 블룸버그 통신은 풀이했다.

프랑스는 ‘레바논 문제’를 두고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왔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폭발참사에 관해 “투명한 국제사회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곧 30만명 이재민 지원 등을 포함해 레바논에 적절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유럽연합, 미국, 다른 국가들과 국제회의를 소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2018년 프랑스가 주도한 ‘레바논 지원을 논의하는 국제회의’는 레바논에 11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레바논 정부는 여전히 국제회의가 원하는 수준의 경제개혁을 단행하지 못했고, 최근까지도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메리칸베이루트대학의 라미 코우리 교수는 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에 “레바논은 당장 인도주의적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지만, 결국은 정치적 변화도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종파 간 세력 분배’ 토대 위에 마련된 정치 체제 때문에 지도자의 능력이나 리더십보다 종교가 더 중요하게 작용해왔고, 이것이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레바논은 혈통으로는 아랍계(95%)와 아르메니안계(4%)가 주축이고 기독교와 이슬람 17개 종파가 공식으로 인정된다. 128석의 의회는 기독교와 이슬람계 정파가 절반씩 나눠 갖는다.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각각 맡는 권력 안배 규칙을 따른다.

마크롱 대통령은 “레바논 정치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정치 협상을 제안할 것이고, 국제사회 원조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9월에 다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레바논 매체 데일리스타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마크롱 대통령이 말한 ‘새로운 정치 협상’이 종파 기반의 통치 체제 변화까지 이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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