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흘이라는 단어가 검색엔진의 인기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그 연유가 웃긴데 정부 시책에 ‘사흘’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흘을 4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사흘을 ‘4흘’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샘 오취리와 의정부고의 블랙페이스 논란이었다. 매해 한국에서 유행한 밈들을 따라 하며 졸업사진을 찍었던 의정부고 학생들이 흑인을 흉내 내려 블랙페이스(blackface)를 한 것이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이러한 형상을 지적하고, 그 지적 과정에서 한국인들을 인종차별자로 몰았다며 논쟁이 격해진 것이다. 샘 오취리는 해당 사항에 대해 사과문을 게시했고 인터넷에서는 샘 오취리와 연대하겠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퍼졌다.
이 두 사건을 살펴보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종종 목격되는 감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분노다. 사흘이 4일이 아니라 3일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는데 3일이 아니라 사흘이라고 썼냐고, 정부가 잘못한 것이라며 열을 올린다거나 블랙페이스가 왜 인종차별인지 한국에 있는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화를 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무지의 자존심’이라고 부른다.
언젠가부터 무언가 배워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이 늘어났다. 사흘을 4일로 착각할 수 있다. 흑인의 인권 문제나 역사 등을 몰랐다면 민스트럴 쇼나 블랙페이스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과 지적이 일어나면,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함에도 마치 자신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악당을 마주한 것처럼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마치 그 지식을 인정하면 그들의 삶이 지금까지와는 극적으로 변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것은 반지성주의 같은 거창한 이름이 아니다. 그것보다 이 사태는 나의 삶에 필요 없는 잉여 정보들에 대한 극단적 거부에 가깝다. 사람은 누구나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 자신의 삶에 필요한 정보를 채워간다. 인간의 삶은 짧고 지식의 양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누적되었다. 내가 경험한 적 없고 체험한 적 없는 걸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것은 마치 타인과의 경쟁에서 내가 지는 것처럼, 내가 모자란 것처럼 여겨진다.
온라인 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청자와 화자를 폭력적으로 연결한다. 청자 없이 무작위로 이야기된 ‘지적’은 순식간에 아무 관련 없는 나에게로 도착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가르치려는 꼰대들이 아무 죄 없는 나를 습격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러한 사람들의 히스테리가 터져나오고, 무지의 세계를 지키려는 히스테리는 또다시 다른 청자들에게 불시착한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발작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만 가득해진다.
가끔 팟캐스트나 유튜브, TV 등에서 이루어지는 인문학 강좌 열풍을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든다. 너도나도 ‘무지한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지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꼬투리를 잡거나 윤리가 대중문화를 망가뜨린다고 개탄하는 시대에서 남을 가르치고 배우는 프로그램이 유행하다니. 지독한 아이러니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