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 별거냐, 이런 게 종말이지.” 박민정의 소설 ‘모르그 디오라마’는 19세기 말 파리, 무료극장처럼 운영된 시체공시소 ‘모르그’를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당시 여러 나라에서 신원미상의 시신 확인을 위한 시체공시소를 운영했지만, 대형 쇼케이스 안에 시신을 전시하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연인원 100만여명이 몰려드는 ‘스펙터클 공연장’이 된 도시는 파리뿐이었다.
그리고 21세기의 지금, ‘인도코끼리-12, 인도코끼리-M14’라고 이름 붙은 어떤 신체들이 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계속되는 사건들이 있다. 어느 날 망해가는 외국계 포털회사 게시판에 누군가 강간을 당하거나 벌거벗은 몸을 찍은 불법 촬영물이 무더기로 올라온다. 이 사건으로 존재마저 잊혀가던 이 회사는 10년 만에 대형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다. 회사의 8년차 과장인 주인공 ‘나’는 대학시절 교수가 해줬던 이야기, 파리 모르그에 전시된 익사한 소녀의 두상 ‘센강의 신원미상의 소녀’를 떠올린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어 온갖 추측과 소문의 대상이 됐고, 끝내는 죽어서도 석고상을 비롯한 수많은 복제본으로 본떠져 먼 훗날 심폐소생술 마네킹의 모델이 되었다는 소녀의 두상 말이다.
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 260쪽 | 1만3000원
‘모나리자의 미소’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관음의 대상이 돼 죽어서도 죽지 못한 소녀, 인도코끼리 따위 ‘품번’으로 불리며 ‘디지털 시대의 스펙터클’로 소비되는 여성들의 몸. 소설은 세기말 파리의 모르그와 불법 촬영물 유포 범죄, 주인공이 기억에서조차 지운 어린시절의 어떤 사건 등 다양하게 변주한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 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직조한 이야기들을 통해 여성의 몸에 가해진 유구한 폭력의 역사를, 그 폭력으로 조각조각 파괴된 여성 주체의 모습을 그린다.
“이것이 서울 피토레스크였다. 교수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1999년의 우리들이었다면 다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긴 우리가 죽은 세상이야, 우리는 이곳에서 적응해서 살든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노력해야 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사건 후 회사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부장은 경찰에 붙잡힌 중학생 유포범에게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들 물건이나 취급한다”며 윽박지르고, 그를 비롯한 남자 직원들은 하필 영상에 피해자의 성기가 노출돼 회사가 ‘개망신’을 당했다고 한탄한다. 여성 동기는 ‘나’에게 사실은 자신도 성범죄의 피해자라고 털어놓는다. ‘나’는 이 사건 후 자신이 “잠시 죽었었다”고 기억하는, 과거의 어떤 순간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팟. 하얀 플래시가 터졌고 그때 나는 죽었어.”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박민정의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가 출간됐다. 책에는 2019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모르그 디오라마’를 비롯해 성폭력과 젠더 불평등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여러 편 실렸다. ‘n번방 사건’의 시작이 단순히 가해자 몇 명의 악랄함 때문만은 아니듯,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폭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돼 오늘도 반복된다.
2018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단편 ‘세실, 주희’와 표제작 ‘바비의 분위기’는 여성의 몸을 향한 시선의 폭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모르그 디오라마’와 연결된다. 소설은 미국의 한 축제에서 찍힌 영상이 인터넷 사이트에 ‘nice asian slut 43%’라는 제목으로 게시되거나(‘세실, 주희’), 자신의 몸을 힐끔거리는 시선에 시달리는(‘바비의 분위기’) 인물들과 이들을 둘러싼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그리며 여성에 대한 다중 억압을 드러낸다.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 박민정의 신작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가 출간됐다. 작가는 신중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폭력과 젠더 불평등의 문제를 예리하게 그렸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한 여성이 할머니의 후암동 적산가옥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기억을 복원하는 전개를 취한 소설 ‘신세이다이 가옥’은 학대와 차별이 공기처럼 흐르는, 가족이라는 가부장제의 가장 노골적인 현장을 그린다. 딸이라는 이유로 해외 입양된 사촌 언니들, 갖은 멸시를 당했던 미혼모 고모와 그의 딸, 막내 손자만 남겨둔 채 손녀딸들의 입양을 결정한 할머니로 연결되는 3대를 화자인 ‘나’의 시각으로 그린다. 이 가족의 남성 인물은 부재하거나 무력하고, 입양의 방관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한국을 찾은 조카 ‘야엘’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비극적인 가족사의 중심인물은 가부장제의 대리 주체가 돼 딸들을 학대한 할머니였다. “생기는 게 딸이면 떼버리라는 말도 거침없이 했던” 여아 낙태의 긴 역사, 가족 안에서도 버려지는 딸들. 소설은 한국 가부장제의 모순을 압축해 놓은 듯한 후암동 3대 이야기를 통해 모든 슬픔을 여성들이 도맡아 감당해야 했던 가족 안의 그림자를 그린다. 그것은 어떤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에겐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일 것이다.
등단 후 여러 작품에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문제를 예리하게 짚은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도 냉정하고 신중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 시대 여성들 이야기를 전면에 썼다. 역사적인 사건과 현실의 문제를 병치해 보여주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과 혐오의 양상을 고발한다.
소설이 끝나도 소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현실은 이어진다. 책장을 덮으며 짧지 않은 여운과 함께 간단치 않은 질문이 남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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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수 기자 sms@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