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자 여럿이 엠티를 가고 평소 하지 못한 ‘도전’을 하는 예능이라면 이골이 나게 봤다. 하지만 출연진이 모두 여자 운동선수라면? 씨름선수 출신 강호동·이만기부터 안정환과 서장훈·허재·현주엽 등 남성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테이너)의 계보는 오래됐지만 여성 스포테이너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식빵언니’ 배구선수 김연경 정도지만, 그 역시 고정 출연한 TV예능은 없다.
그렇기에 지난 4일 첫방송 한 E채널 <노는 언니>는 분명 신선했다. ‘여성 스포츠 선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노는 언니>는 그동안 남성 중심 예능에 가려졌던 여자 운동선수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13일 서울 상암 E채널 사무실에서 만난 방현영 CP(총괄 프로듀서)는 “앞으로 평생 운동만 해온 ‘언니들’이 별 것 다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는 언니>엔 골프 박세리를 비롯해 펜싱 남현희, 배구 이재영·이다영 자매, 피겨 곽민정, 수영 정유인 등 전현직 운동선수들이 출연한다. 3회 방송부터는 현역인 이재영·이다영 자매를 대신해 전 배구선수 한유미가 출연했다. 이들은 제목처럼 제대로 놀았다. 1~2회에선 첫 만남을 기념해 엠티를 떠났고, 3회부터는 스포츠 룰을 변형해 치뤄지는 ‘언림픽(언니들의 올림픽)’이 열렸다.
방현영 CP는 세간의 관심에 “채널 인지도가 높지 않아 기대 없이 출발했는데, 큰 관심을 주셔서 신기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출연자들도 신이 났어요. 특히 박세리 선수가 세번째 촬영을 마친 뒤에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며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본인들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큰가봐요.”
방 CP는 “새롭지 않은 아이템도 이들이 한다는 것만으로 새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선수들에겐 늘상하던 운동조차 놀이가 됐다. 머리로 치는 골프, 상대방 몸에 물감을 묻히는 펜싱 등 기상천외한 경기방식에 일부 선수들은 ‘지기 위해’ 애를 썼다. 방 CP는 “선수들에게 승부에서 해방된 체육은 낯선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박세리 선수는 쓰는 근육이 다르다는 이유로 현역 때 다른 운동을 일절 해본 적이 없대요. 휴가를 가도 몸을 다칠까봐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처음엔 운동 말고 해본 게 없으니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어도 다들 대답을 못했어요. 그랬던 선수들이 이제는 서로 이것 저것 해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어요.”
2007년 MBC에 입사, 2011년 JTBC로 이직해 <한끼줍쇼> 등을 연출한 방 CP는 어느덧 14년차가 됐다. 지난 4월 책임 프로듀서 직책으로 E채널에 새 둥지를 틀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노는 언니>를 기획했어요.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시청률이나 채널 데이터를 참고하는데, 참고할 데이터조차 없었어요. 평소 관심 있던 문제를 질러 보자. 만약 기존의 방식을 따랐다면 <노는 언니>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건 쉽지 않았다. 일반인만 출연해서 관심을 끌 수 있겠냐, MC가 있어야 한다 등 쏟아지는 조언과 우려 속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 박세리였다. 방 CP는 “불안감이 세리 선수를 만나면서 사라졌다”며 “기획 취지를 듣곤 ‘어떻게 이런 걸 생각했냐, 필요했다’며 먼저 질러주시는데, 그때 추진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나중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수락하셨냐 물으니 같은 고민을 그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여자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줄 수 있다고 하시면서 남자 선수들과 맞대결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도 주셨어요.(웃음)”
박세리를 영입한 뒤 ‘동생 선수’들도 줄줄이 섭외가 됐다. 방 CP는 여러 선수들을 만나보며 몰랐던 ‘현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정유인 선수는 SNS에 사진을 올릴 때 포토샵으로 근육을 줄였대요. 운동을 위해 단련한 것인데 팔뚝 굵기를 가지고 ‘너는 여성적이지 않다’고 말하거나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요. 가슴이 아팠어요.”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충격을 받은 건 방 CP였다. ‘아, 지금까지 여자들이 이렇게 그려진 적이 없었구나!’ 그는 “여자 선수들끼리 있으니 유인 선수도 자연스럽게 근육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더라”며 “유인 선수의 팔뚝이든 세리 선수의 우람함이든 그게 다 이들의 힘이고, 멋이다. 제작진이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광산을 발굴한 기분이었어요. 성역할 구분이 없고, 키 큰 사람·작은 사람,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못하는 사람… 이렇게 역할이 나눠졌어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남자들 몫이라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어요. 이전까지 트레이닝 받은 예능 문법이 ‘클리셰’였다는 걸 깨달아가는 중이에요.”
방 CP는 <노는 언니>가 선수들과 자신에게 단순한 TV예능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선수들을 만나보면 TV에 나오는 건 부끄럽지만, 본인이 알려져야 종목이 알려진다는 걸 너무 잘 알아요. 그게 결국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요. 책임감이 생겼어요. 같은 종목인데 남자 실업팀만 있고, 여자 실업팀은 없어서 본인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그런 실태도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리고 싶어요.”
●
이유진 기자 yjleee@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