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사흘 연휴’는 마지막까지 다사다난했다. 코로나의 시절과 긴 장마에 지친 마음들에 하루치 행복이 더하길 바랐지만 코로나19의 재창궐과 함께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일상은 더한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바람에 임시공휴일(17일) 지정을 전후해 말 많던 ‘4(사)흘’에 대한 기억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졌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그사이 만났던 꽤 많은 이들이 ‘4흘’을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 “참 놀랐다”는 감정표현과 함께 ‘4흘’은 곧잘 등장했다. 네이버 실검을 장악했던 ‘사흘’의 영상이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충격 반응(심지어 20대였다)부터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 문제’를 진심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자가 난 과거 기사들의 ‘4흘’이 SNS로 소환돼 기레기의 또 다른 증거로 활용될 땐 당혹스러웠다.
나로 말하자면 역시 좀 놀라긴 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사흘 정도는 아니라도 오래전부터 너무도 일상적인 단어들이 네이버 실검에 떠오르던 풍경이 새삼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흘로 상징되는 이 같은 ‘네이버 실검 현상’은 언어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일 수 있다. 과연 사흘의 망각은 언어의 빈곤, 언어의 실종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젊은 세대의 언어 무지를 증거하는 것일까.
사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걱정하는 그들도 따지고 보면 지금 흘러다니는 말 중 많은 것을 모른다. 내 경우도 ‘갑분싸’ ‘TMI’는 최근에야 알았고, 그보다 앞서 ‘웬열’ 때문에 머리를 갸우뚱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도 ‘혼코노미·일코노미’ 같은 걸 보면 이게 말인가 싶다. 일부에서 은어처럼 통용되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인 미디어들에도 버젓이 등장한다. 이미 우리 언어생활의 한 부분으로 들어와 있다는 의미다. 다만 차이는 그 세대는 익숙지 않은 이 새로운 언어들을 네이버에서 찾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좀체 ‘네이버 실검 현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거꾸로 젊은 세대들은 이런 단어들이 네이버에 오를 때 ‘웬열(웬일이래)’할지 모른다.
오래도록 언어를 다뤄온 번역가 신견식씨는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전이나 문법 책에 담긴 고정된 언어는 이상적인 가상의 구성체일 뿐이다. 실제의 언어는 늘 움직인다.”
끊임없이 유랑해온 언어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한 증거물이 ‘어원’을 따지는 일이다. 우리가 ‘경제’로 알고 있는 영어 ‘economy’는 ‘집·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에서 기원한다. ‘지불하다’의 의미를 가진 ‘pay’는 라틴어 ‘pacare(파카레·평정)’에서 왔고, 이는 팍스(pax·평화)와 연결된다고 한다(<언어의 우주…>).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역사 동안 멈춰 있었던 적이 없다. 멈춘 언어들은 박제가 돼 언어의 박물관에 들어갔거나, 소멸의 관 속에서 잠들었다. 사흘에 당연함을 느끼는 이들도 닷새·엿새를 지나 이레·여드레 즈음에 이르면 현저히 친밀함이 떨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 계열의 말들은 이미 그런 운명(소멸)에 들어서 있다.
‘사흘’의 세대는 사전과 함께 언어를 고정화해온 세대다. 모르는 단어도 맥락 속에서 짐작하며 사전을 통해 확인하거나,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의미를 새겨왔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직관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직관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은 바로 묻는다. 그것이 ‘네이버 실검 현상’이다.
말은 글말에서 입말로 가기 마련이다. 영상과 온라인 문자 대화의 간편함이 자연스러운 세대들에겐 더욱더 글말의 자리는 얕아지고 입말로의 대체가 빠를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을 향한 웅변보다 그들에겐 1 대 1의 즉각적 대화가 더 우선한다.
일본 언론인 데라야마 슈지는 “이제 표준어는 정치를 떠드는 말로 전락해버려서 ‘인생을 논하는 말은 방언밖에 남지 않았다’”고 탄식한 적이 있다.
우리 언어에 필요하고, 또 추구해야 할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양성’이다. 방언이든, 은어 같은 줄임말이든 다양한 말들이 생기 넘치게 부딪치고 관계를 맺는, 그러면서 또 다른 세계로 진전해나가는 그런 언어 세계다. 물론 ‘사흘 세대’의 걱정처럼 신조어들이 고유어들을 죽이고 오히려 언어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언어에 대해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만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과 세대,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움이 될 것이다. 사흘을 잘 모르는 게 놀라울 수는 있지만, 큰일이 난 양 걱정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