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사망, 반복의 고리 끊으려면

울산 울주군에서 7세 이서현양을 때려 숨지게 한 의붓어머니에게 2014년 4월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자 아동학대 반대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사형 선고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를 엄벌이 필요한 극악무도한 범죄로만 보는 관점을 넘어 학대 가정을 어떻게 지원할지 사회복지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많은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해 만든 국내 유일의 아동학대 사망 종합보고서로 여겨지는 ‘이서현 사건 보고서’는 출생등록 의무화, 보편적 형태의 가정방문서비스 제도화, 아동 긴급보호 인프라 구축 등을 제안했지만 여전히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이서현 사건’이 사회 뒤흔든 후
아동학대특례법 제정되는 등
‘가해자 엄벌’은 쉽게 반영됐지만
학대가 벌어진 가정은 보지 않아
‘화장실에서 낳아’ ‘여행용 가방에 가둬’ ‘입에 손수건 물려 죽게 해’…. 아동학대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한국 사회는 들썩였다. 가해자는 ‘비정한 부모’로 그려졌고 여론은 엄벌을 외쳤다. 전문가와 현장 실무자들은 아동학대와 살해를 예방하고 피해 아동의 치료와 회복을 위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회에서도 아동학대와 관련된 법안들이 무더기로 발의됐다.
무수한 외침에도 변화는 미미했다. 관련 논의가 공회전하는 사이 영아들은 ‘중첩된 위험’ 속에 죽어갔다. 교육기관을 다니지 않아 모니터링 사각지대에 있었고, 방어나 저항을 할 수 없는 나이였으며, 학대와 방임은 생명에 위협을 줄 만큼 강했다. 경향신문은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간 발표된 정부 대책과 전문가 제언을 살펴봤다. 현장에선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실무자 의견도 들었다.
■ 한발 느린 법, 구멍 뚫린 제도
학대사망 영아 사례 54건 중
부모가 10~20대인 경우가 절반
지식 부족해 부적절한 양육 태도
경제적 궁핍이 학대에 영향 미쳐
학대행위 자체 처벌과는 별개로
복지 측면에선 부모도 지원 대상
피해자-가해자 구도에서 벗어나
학대 가정 지원할 방법 고민해야
법은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타났다. 사실상 사문화돼 있던 아동학대 개념을 명확히 한 건 2000년 개정 아동복지법이다. 1998년 SBS 시사 프로그램 <추적! 사건과 사람들>에서 ‘영훈(가명) 남매 사건’을 다룬 뒤 전문 개정됐다. 개정된 아동복지법은 ‘아동학대’를 처음으로 정의했고, 국가와 지자체가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2013년 10월 울산 울주군에서 의붓어머니에게 맞아 죽은, 일명 ‘이서현 사건’이 사회를 뒤흔든 후에는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아동학대특례법)이 2014년 제정·시행됐다.
경향신문이 2018~2020년 ‘아동+학대+사망’ ‘영아+학대+사망’ 키워드로 언론보도를 검색한 결과 비슷한 제도 개선안이 반복해 등장했다. 제도 개선은 크게 예방 대책, 사건 대응책, 사후 관리 대책 등 세 유형으로 나뉘었다. 예방 대책에는 가정방문 서비스, 출생통보제, 양육지원, 부모교육 등이 있다. 사건 대응책에는 신고 활성화, 조사 강제성 확보, 가해자 처벌 강화 등이 있다. 사후 관리 대책에는 원가정 복귀 시 모니터링 강화, 가해 부모 교육 및 치료, 사례관리를 통한 재학대 예방이 있다.
사건 대응책은 비교적 빨리 변화했다. 20대 국회는 아동학대특례법과 아동복지법을 7차례 개정했다. 신고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과태료를 인상하고, 현장조사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했다. 상습 아동학대를 하거나 아동학대 치료 프로그램 이수명령을 불응한 가해자에 대한 벌금을 상향했다. 아동학대 범죄 전력을 가진 사람의 취업 제한 대상 기관 범위도 추가했다.
‘인면수심의 가해자를 엄벌해야 한다’는 여론은 제도에 쉽게 반영됐다. 2018년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아동학대치사죄의 경우 최대 징역 15년, 아동학대중상해죄는 최대 12년을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 수정안을 의결했다.
사회는 ‘극악무도한 사건’ 자체에 몰두했지만 영아학대가 벌어진 가정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언론보도, 판결문, 무연고 장례 시행 목록에서 추출한 학대사망 영아 사례 54건을 살펴보면, 학대를 행한 부모가 10~20대인 경우가 최소 25건이었다. 주로 울음을 그치지 않는 상황을 참지 못해 폭력을 가하는 등 양육지식이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양육태도를 보이다 아이를 사망케 했다. 미성년 부모의 경우 차별적 시선을 두려워해 아이를 유기하거나 살해하기도 했다. 경제적 궁핍이 학대에 영향을 미친 걸로 보이는 경우도 10건에 달했다.
영아학대의 맥락을 살피지 않은 사이 예방 대책과 사후 관리 대책은 공허하게 반복됐다. 2014년 ‘이서현 사건 보고서’에 나온 핵심 제안 중 일부는 올해 정부 종합대책에도 빠져 있다. 이서현 보고서는 2013년 울산 사망사건을 분석한 한국 유일의 아동학대 사망보고서다. ‘출생등록 의무화’ ‘보편적 형태의 가정방문 서비스 제도화’ ‘아동 긴급보호 인프라 구축’ 등이 여전히 현실화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를 ‘끔찍한 범죄’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 학대가정을 어떻게 지원할지 사회복지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밝혔다. 권태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사업본부 팀장은 “학대 행위 자체는 처벌과 교정이 필요하지만, 복지 측면에서 보면 학대 행위자도 지원 대상”이라며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처벌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더 이상 학대가 발생하지 않고 아이가 안정적으로 보호 받도록 지원하는 체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 말뿐인 예방책, 허덕이는 현장
가장 중요한 예방책인 가정방문
현장에선 전문 인력 부족 호소
인프라 구축 위한 재원 확보 절실
부모교육 의무화도 도입될 필요
가정방문은 영아학대 예방책으로 중요하게 거론되는 제도다. 영아는 어린이집, 유치원 등 교육기관을 다니지 않아 학대 피해가 포착되기 어렵고, 이웃도 ‘아기라서 운다’고 판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사전 방문은커녕 학대가 발생했을 때 사건을 조사할 전문인력조차 부족하다는 호소가 나온다. 지난 21일 고영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주최한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제도 및 대응체계 개선 방안 토론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 1명당 평균 아동학대 사례 64건을 맡았다. 2014년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발표한 ‘1명당 58건’보다 6건 늘었다. 미국 아동복지연맹(CWLA)이 제시한 아동보호 서비스 적정 건수인 상담원 1명당 12~17건보다 4배 정도 많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보니 지난해 기준 상담원 3명 중 1명이 현장을 떠났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의 평균 근속연수는 3년이 채 안 된다. 한 지역 기관에서 4년째 일하는 A씨는 “기관 한 곳에서 여러 시·군·구를 맡는 경우가 많다”며 “업무량이 많아 오후 10시나 11시까지 야근은 일상이며 주말 출근도 필수”라고 전했다. 그는 “가정방문 등 업무가 고되고 폭력적인 대상자들을 자주 만나 트라우마가 남는다. 대책이나 보상이 없어 빨리 소진된다”고 말했다.
퇴사가 잦으니 경험을 쌓은 전문인력도 부족하다. A씨가 다니는 기관에서는 입사 1년 미만 직원의 퇴사율이 가장 높다. 최근에는 3개월 미만 다닌 상담원 3명이 사직서를 냈다. 다른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에 다니는 B씨는 “국가 차원에서 아동학대 관련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바람직하지만, 현장 실무인력을 보강해주지 않은 채 대책만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10월부터 개정된 아동학대특례법과 아동복지법이 시행된다. 아동보호전문기관 등 민간에서 담당해온 아동학대 조사를 각 지자체에 배치된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맡는다. 학대 의심 신고가 들어오면 전담공무원이 출동해 가해 행위자를 조사한다. 기관은 사례관리를 맡는다.
전문가와 현장 실무자들은 아동학대 조사 체계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강제조사가 가능하게 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전담공무원이 전문성을 갖추고 있을지, 학대 조사와 사례관리 사이 소통이 잘 이뤄질지 등에 우려를 표했다. 이동건 전국아동보호전문기관협회장은 “10월 개정법 시행으로 아동학대 조사는 전담공무원이, 사례관리는 기관이 하도록 업무가 나뉘었다. 조사와 사례관리는 같은 기관에서 진행해야 원활하다”며 “조사자는 행위자나 아동의 얼굴, 표정, 어투, 태도 등을 눈으로 관찰한다. 사례관리자에게 문서상으로 전달했을 때 이런 정보가 잘 전해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A씨는 “아동학대 업무 특성상 전문적으로 일하기까지 최소 1년이 걸린다”며 “공무원은 짧으면 몇 개월, 보통 1년 간격으로 보직이 변경돼 전문성을 갖출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B씨는 “지자체마다 다르지만 인수인계가 잘되도록 초반에는 동행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 실질적 변화를 위해서는
학대 예방과 사후 관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건 결국 ‘사람’과 ‘돈’이다. 아동학대 관련 예산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주무부처인 복지부의 정식 예산보다 법무부의 범죄피해자보호기금과 기획재정부의 복권기금에서 끌어오는 예산이 더 많다. 2020년 아동학대 관련 예산은 총 296억3900만원이다. 이 중 225억7800만원은 범죄피해자보호기금, 59억3300만원은 복권기금에서 나온다. 복지부 일반회계는 11억2800만원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학대피해 아동 관련 사업비가 아니라 아동권리보장원 운영비, 홍보사업비 등으로 쓰인다.
현장에선 매년 다르게 걷히는 기금 재원으로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국가아동학대정보시스템·학대피해아동쉼터를 운영해야 해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많다고 말한다. 김민정 안산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은 지난 21일 국회 토론회에서 “현재 학대피해 아동 보호를 위한 사업비는 기관당 2700만원”이라며 “안산시는 지난해 연간 1691건의 학대 아동을 발견했다. 아동 1명당 1만6000원밖에 지원하지 못한 셈”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선 2014년부터 아동학대 예산을 복지부 일반회계로 편성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바뀌지 않았다. 안정적 재원 확보 없이는 제대로 된 양육지원, 부모교육, 사례관리 등을 위한 인프라 구축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복지부 관계자는 “일반회계로 전환된다 해서 무조건 예산 사정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서 아동학대 예산 비율을 6%에서 8%로 상향하고, 피해 아동 치료비 등 사업비를 제외한 인건비는 일반회계로 편성하는 등 재원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기가정을 미리 파악해야 모니터링 사각지대에 있는 영아의 학대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복지부가 31일 국회에 제출한 ‘2019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학대로 사망한 아동 42명의 45.2%가 영아(0~1세)다. 전문가들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 등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위기가정을 파악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강조했다. 노 교수는 “양육자가 주민센터 등 기관에 찾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며 “오히려 기관이 먼저 양육자를 찾아가 협력자가 돼야 한다. 아무런 낙인 없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필요한 지원들을 함께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현아 숙명여대 아동복지학부 교수는 “취약계층 부모의 사례를 나눠 맞춤형으로 양육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부모교육 의무화도 도입돼야 한다고 말한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교육을 자율적으로 진행하면 대상자인 위기가정 부모는 오지 않는다”며 “아동수당 등 정부 서비스를 받을 때 무조건 부모교육을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동건 협회장은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영아가 작은 충격에도 취약하다는 걸 모르는 등 아이를 잘못 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있다”며 “아동수당을 받거나 어린이집을 보내는 등 일정 시기마다 영아의 발달특성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부도 보고서에서 “가정 내에서나 양육자에 의해 학대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 ‘체벌은 학대’라는 인식을 홍보하고 올바른 양육 방법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