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왜 이렇게 댓글을 달 일이 많은지.
지난 8월15일 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19는 심화되었고 의사들은 파업하고, 국회의원의 발언은 넘쳐난다. 경제 위기부터 성추문까지, 뉴스와 신문의 사회란은 연일 새로운 소식으로 갱신한다.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하자면 사건이 많다는 말보다 악당이 많다는 말이 더 들어맞으리라. 세상에 이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니. 세상엔 타인을 때리고, 모욕 주고, 업신여기고, 탈취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미디어는 매일매일 새로운 악당을 전시한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그런데 악당에 비해 나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다. 이미 사회는 너무 거대해 나 같은 일개 개인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듯하다. 그럴 때 손쉬운 도피처가 바로 댓글이다. 악당들에게 욕을 하고 모욕을 주고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욱한 마음에 댓글이라도 달아서 화풀이해야겠다 싶으면 그 기사의 댓글난은 이미 엉망진창이다.
그렇기에 댓글의 주어는 종종 ‘나’라는 단수가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이 된다. 국민, 시민, 독자, 고객, 학생…. ‘나’라는 개인의 목소리는 쉽게 닿지 않으니 나라는 사람을 비대하게 부풀려 허세를 부려야만 한다. 나는 그저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는 배달원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행위는 쉽게 ‘정의로운 것’처럼 포장되곤 한다. 내가 속한 집단이 모두 ‘나쁘다’라고 하거나, 내가 속한 집단이 모두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러한 행위를 나서서 댓글로 다는 것이 얼마나 사명감 충만한 행위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종종 악당이 등장하는 기사에 악플을 다는 것이 마치 정의로운 시민의 의무인 양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 댓글 달기가 정말로 정의로운 행동일까. 그 누구도 기사의 악플이 상대에게 제대로 닿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그럴지도 모른다며 자신을 속일 뿐이다. 기사 속 사건이나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다. 단지 ‘너도 이 글을 보면 화나지? 나도 화나. 그러니까 서로 악플을 쓰면서 우리가 같은 정서를 갖고 있다고 확인하자’. 같은 댓글러들의 사회적 행위만 허무하게 남을 뿐.
그래서 사회가 바뀌는가? 그렇지 않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픈,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확인만 무한하다. 댓글은 사건을 마주한 직후 즉시 일어나는 원초적 감정이다. 슬픈 기사를 보면 누구나 동물적으로 슬퍼하고, 기쁜 기사를 보면 누구나 동물적으로 기뻐한다. 때로는 기사가 아니라 키워드 몇 개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본문을 보지 않고 다는 댓글들도 허다하니, 그야말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뿐이다.
세상에는 왜 이리 댓글 달 일이 많은지. 오늘도 수많은 뉴스들이 내 피드를 가득 채운다. 어떤 사람의 거짓말은 또 화가 나고, 어떤 집단의 정치적 수사는 또 화가 나고, 어떤 살인자의 뻔뻔스러움은 또 화가 나고…. 울화통 터지는 세상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고작 댓글밖에 없다니. 댓글 넘치는 사회 속, 댓글 숫자와 정비례한 허무감만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