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장영은

통계학으로 의료 개혁을 이끌다,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과 했던 약속,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보건·의료·복지가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사진은 1870년의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과 했던 약속,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보건·의료·복지가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사진은 1870년의 나이팅게일.

영국 귀족 사회 박차고 나와
전염병 만연한 크림전쟁 자원
병사 의무기록체계부터 개혁

“저는 공직에 계신 분들을 언제나 믿어왔어요.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이분들이야말로 제가 본능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사태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고 공식적으로, 고의적인 방식으로 타인들은 알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지금껏 벌어진 일만큼이나 혐오감이 밀려듭니다. (…) 정부는 1854년도에 겪은 끔찍한 교훈의 산물을 고의로 파괴했어요. 누구에게든 다시 편지를 보내어 정부와 군대가 책임져야 할 군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마저 박탈당할까 두려워요. 물론 여성 한 명이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기회가 언제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선량한 행위로 시작된 실험과 무자비한 행동 모두에 제가 희생양이 되고 말았지요.”

1853년 7월, 러시아군은 오늘날 루마니아 영토에 해당하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침입했다. 석 달 뒤인 10월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 받은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교훈을 남겼다”고 역사에 기록된 크림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영국군의 수는 약 5000명이었다. 더 큰 복병이 나타났다. 전염병이 돌았다. 콜레라로 군인 1만5000명이 사망했다. 영국은 부상병 간호를 위한 자원봉사대를 모집했다. “영국에는 진정 크림반도로 갈 용기 있는 간호사가 없는가?” 당시 런던의 한 요양소 경영을 맡고 있었던 서른세 살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전쟁터로 돌진했다.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크림반도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육군부의 허락이 없어도 저는 크림으로 가겠습니다.”

1820년 영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의 삶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간호사를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귀족의 딸이 할 만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잠시 쓰러졌다. 나이팅게일의 언니도 동생을 뜯어말렸다. 가족 가운데 누구도 나이팅게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혼자서 의료 서적을 읽고, 병원과 요양소를 방문하면서 차분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귀족 사회를 박차고 나왔다. 1852년 쓴 글에서 나이팅게일은 영국 상류층 여성들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영국 사회를 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남성의 시간이 여성의 시간보다 더 귀중한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853년 나이팅게일은 런던 요양소에 책임자로 부임했다.

[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막사를 둘러보는 나이팅게일을 그린 일러스트(위 사진)와 1907년 노년의 나이팅게일.

막사를 둘러보는 나이팅게일을 그린 일러스트(위 사진)와 1907년 노년의 나이팅게일.

1854년 11월4일,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도착했다. 나이팅게일은 “스쿠타리 막사 병원”에서 절규한다. “누구도 씻을 곳, 씻을 도구 하나 없어요. 깨끗한 물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용감하게 뚫고 가는 5만명의 병사를 위해 가져온 군용 리넨 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러시아군이 아니라 무능하고 무책임한 영국 군부였다. 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침대와 이불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나이팅게일은 영국 육군부 장관 시드니 허버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매트 한 장을 공급하는 데에도 반드시 문서가 필요합니다. 침대 구입부터 병동을 새로 개설하는 것까지 상부에 보내는 서신과 제출 서류를 몇 백 통이나 작성해야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영국 군인들에게 먼저 옷부터 만들어 입혔다. 악취와 해충이 전염병 환자 수를 증폭시켰다. 나이팅게일은 병원 청소를 시작했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나이팅게일은 ‘타임스’ 구호기금 약 3만파운드로 주방용품과 식재료를 구입했다.

나이팅게일이 부임한 지 닷새 후인 1854년 11월9일 수많은 부상자가 스쿠타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총감은 아비규환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이팅게일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녀에게 진료 지원과 간호를 요청했다.

나이팅게일은 군 병원의 의무 기록 시스템부터 개혁했다. 일분일초를 아껴 가며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살아 숨 쉬는 것 이외에는 한순간도 여유가 없습니다.” 야전병원에서 사망자 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운영일지를 기록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이팅게일은 환자 숫자와 질병 종류를 의무적으로 기록하고 보고하는 체계를 다졌다. 간호부장 나이팅게일은 부상자와 사망자 숫자를 꼼꼼하게 살폈고, 물품 보유 현황도 반드시 신고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 한 사람의 노력으로 전염병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감염자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1855년 2월 애버딘 총리는 책임을 통감하고 내각 전원 사퇴를 발표한다. 파머스턴이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 시드니 허버트 장관도 내각에 다시 등용되었다. 같은 달 야전병원 실태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병원 내부 위생 상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비로소 공론화되었다. 스쿠타리 병원은 병원 하수구와 급수로를 손보았다.

특별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나이팅게일은 간호부대를 결성하여 존경할 만한 헌신의 마음으로 환자와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맡아 왔다”고 평가했다. 나이팅게일은 입원 중인 환자들을 위해 병원 내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영어 수업을 개설하는 한편, 휴게실을 만들어 교양 강좌를 운영했다. 군인들의 월급을 관리하고 송금할 수 있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나이팅게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나이팅게일의 개혁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1856년 스쿠타리 병원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질서를 확립했다. 영국으로 귀환한 군인들이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이팅게일 기금 4만5000파운드가 순식간에 모였다. 하지만 그녀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수록 반대 세력도 늘어났다. 군사령관 존 홀은 나이팅게일을 음해하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나이팅게일과 간호 원정단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반항적이며, 정직하지 않고, 사치스럽고, 부정부패와 낭비를 일삼았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확인된 바도 없었다. 여성이 개혁을 주도하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여성들은 항상 어떤 사람과 어울리면 안 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성공과 안위에만 몰두해 있는 자들이 승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더 막막할 따름”이라고 응수했다. 자신을 “잔 다르크처럼 불에 태워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1856년 3월16일 나이팅게일에게 씌워진 혐의는 모두 근거 없는 모략으로 결론이 났다.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병원 총책임자로 공식 임명된다.

[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통계에 기초, 정치까지 발 넓힌
보건·의료·복지 향상의 신념
“정치는 인류 행복의 기본 조건
여성이 정계의 중심에 있어야”

1856년 3월30일 파리 강화회의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으로 크림전쟁은 끝이 난다. 4개월 후인 7월28일 나이팅게일은 프랑스로 갔다. 영국에서 준비 중이던 자신의 귀국 환영회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1856년 9월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보건 왕립위원회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보건의료 체계 구축에 매진했다. 의료 개혁을 위해 자료와 통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통계의 실효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수학에 큰 매력을 느꼈다. 나이팅게일은 1856년 의료 통계학자 윌리엄 파르에게 통계 처리 과정을 직접 배웠다.

1858년 나이팅게일은 ‘로즈 다이어그램’을 발표했다. 크림전쟁 기간에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질병의 종류와 입원 기간 등을 재조사하고 기록했다. 복잡한 숫자로 나열된 통계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나이팅게일은 분석 결과를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통계 작업에 매달렸다. “나는 살해당한 사람들의 제단에 서 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들을 죽인 원인과 싸울 것이다.”

1858년 나이팅게일이 발표한 ‘로즈 다이어그램’. 크림전쟁 기간에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질병의 종류와 입원 기간 등을 분석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했다. 사진 크게보기

1858년 나이팅게일이 발표한 ‘로즈 다이어그램’. 크림전쟁 기간에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질병의 종류와 입원 기간 등을 분석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림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의 통계 방식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만만하지 않았다. “통계는 세상의 모든 읽을거리 중에서 가장 건조해야만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860년 나이팅게일은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통계학대회에 참석했다. 통계와 확률론으로 인간 행동과 사회 질서의 규칙성을 밝혀내고 ‘사회 물리학론’을 발표한 아돌프 케틀레를 만났다. 나이팅게일은 케틀레의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제시한 비판적 사고의 틀은 존중했다. 나이팅게일의 학문적 깊이는 점차 높아졌다. ‘타임스’는 “그녀는 외국어뿐만 아니라 수학과 예술, 과학, 문학에까지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재원이다. 현대인이 쓰는 외국어 중에 그녀가 모르는 말이 거의 없을 정도다” “최고의 강점은 수학이다. 숫자와 통계를 전문가 수준으로 다룬다.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데이터를 정리하고 추론한다”고 나이팅게일을 소개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학문적 신념을 철저하게 지켰다. 1868년 그녀는 왕립위생위원회에서 주택 위생을 위해 배수 및 하수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공공보건의료 법률 제정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지역별 보건진료소 운영도 정부에 건의했다. 그녀는 간호학에 국경이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 전역은 물론이고, 1867년에는 호주 시드니 병원에 나이팅게일의 간호학 이론을 따르는 학교를 설립했다. 1870년대에는 미국의 간호사 양성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나이팅게일은 열일곱 살에 자신과 했던 약속,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서의 소명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보건·의료·복지가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정치는 행복한 인간 생활을 하는 데 매우 커다란 힘을 가졌다. 여성이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사회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 영국 의료 개혁의 초석을 닦은 여성 정치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910년 90세의 나이로 생을 평화롭게 마감했다. “나는 행복하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거의 다 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행복은 인류에게 축복이 되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10)아프고 가난한 자를 위해, 숫자를 무기로 세상을 바꾸다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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