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외환위기 때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며 극도의 긴축재정을 강요당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1% 수준의 예산흑자를 유지하라는 내용이었다. 양호한 재정건전성에도 한국은 재정주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결국 이듬해 하루 100개가 넘는 회사가 도산하고 대량실업이 현실화하는 고통을 겪었다. 긴축재정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신자유주의 확산의 첨병 역할을 한 IMF의 대표적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IMF체제에서 벗어난 뒤에 신자유주의는 확산됐고 재정건전성 사수는 한국 경제의 핵심 과제가 됐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하지만 경제위기 시 과감하고도 신속한 재정투입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며 합리적 경제행위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이 같은 국가의 역할을 두고 장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거나 어린 자녀를 양육할 때 돈을 빌렸다가 소득이 많아지면 상환하는 경제활동이 정상적인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빚을 낼 여력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대담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코로나19로 재정지출이 가파르게 늘면서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나라 곳간이 거덜날 판’ ‘슈퍼채무국으로 전락할 것’ ‘남미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식의 암울한 전망이 끊이질 않는다. 이 주장대로 묻지마식 퍼주기→국가채무 급증→국가신용등급 하락→외국인 투자자 이탈→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위기 도래라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미래를 예측하긴 어려우나 적어도 해외 분위기는 국내와 사뭇 다르다.
불안정한 국제금융시장의 흐름을 딛고 지난 10일 정부가 발행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이 유로화 채권시장에서 마이너스 금리로 발행됐다. 이는 재정지출이 확대되더라도 한국 경제가 중장기 재정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에 해외 투자자들이 무게를 싣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국내에서는 정부가 돈을 펑펑 쓰면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난이 사방에서 들리지만 이윤추구에 냉혹한 해외 투자자들은 달리 보고 있다는 의미다.
보수적 국제기구들이 한국의 재정건전성에 후한 점수를 주며 재정확대를 권유해왔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목되는 건 외환위기 때 한국에 긴축을 강요했던 IMF의 변화다. IMF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침체 극복과 불평등 해소를 위해 재정의 적극적 역할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지난해 10월 취임 첫 연설에서 세계 경제성장률 둔화를 경고하면서 한국, 독일, 네덜란드처럼 재정 여력이 있는 국가들이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난 6월 IMF 세계경제전망을 보면 코로나19에 대응한 한국의 재정지출 규모는 GDP 대비 3.1%로 주요 20개국(G20) 국가 5.8%의 절반 수준이었다. 어찌 보면 한국이 재정투입을 더 늘려도 괜찮았을 것이란 얘기도 된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특정 수치를 넘으면 안 된다는 식의 경직적 사고를 탈피할 때가 됐다. 정부 공식 전망을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내년 46%대를 기록하고 2022년 50%를 넘어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60% 이내를 재정건전성 기준으로 삼는다. 미래에 다가올 국가채무 증가세를 감안해도 한국은 여전히 재정건전성 안전지대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적자재정은 방만한 재정운용의 결과물일 수 있지만 의도적 정책의 산물일 수도 있다. 자린고비 재정으로 대응하며 재정건전성을 지킨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제위기 시 재정건전성 프레임에 정부를 가두려만 한다면 정략적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재정건전성을 앞세우는 환경이 조성되면 채권자와 자산가는 유리할지 모르나 일자리를 잃게 되는 노동자들에게는 가혹하다. 과연 이런 상황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확장재정을 지지한다고 재정을 사려 없이 써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재정의 용처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가 논쟁의 핵심이 돼야 한다. 단기적 재정확대는 국채 발행으로 조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론 증세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떤 식의 증세 방안을 도출할지도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길은 원래 있지 않으며 걸어가야 만들어진다고 했다.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아니란 이유로 눈치볼 필요도 없다. 사회안전망을 과감하게 확충하는 쪽으로 재정을 의미 있게 운용한다면 코로나19 위기 극복 과정에서 모범국가로 평가받는 날이 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