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인왕산 숲속은 어수선했다. 바람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나뭇잎들 사이로 여전히 수런거리고, 길을 막은 낮은 덩굴들은 걸음에 차일 때마다 흔들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뭇가지들과 잎, 잔모래들이 널브러진 이 쓸쓸한 길이 왜 이리도 다정할까. 마치 ‘세한도(歲寒圖)’처럼.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유배지 제주에서 그린 ‘세한도’는 아둔한 내 눈에도 유독 와닿는다. 그 쓸쓸함이 참 깊다. ‘절절한 기개’까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림을 볼 때면 ‘아 저런 것이 고결한 고독인가’ 싶다.
얼마 전 ‘세한도’ 기증 소식을 들었다. 우연찮게 그보다 몇 달 전 그림에 얽힌 사연을 접한 적이 있었던지라 내 것도 아니지만, 주제넘게 감회가 남달랐다.
“내 아들이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말아달라. 욕심이 생긴다.”
‘세한도’ 소장자인 손창근씨가 그림을 위탁관리하던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에게 크게 역정을 내면서 당부한 말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이 ‘세한도’를 한번 열람한 게 발단이었다. 종국엔 기증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사후에 문제라도 생길까 염려한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아들인데 화까지 낼 일이었을까.
손씨는 2018년 11월 국보·보물급 유물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부친 손세기씨에 이어 2대에 걸쳐 수집한 가문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손씨는 딱 한 점만은 남겼다. 위탁관리로만 두고 기증서에 서명하진 않았다. 바로 ‘세한도’였다. 그 그림이 그가 얼마나 ‘애정’하던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평생 자식보다 더 귀하게 아낀 작품”이라고 한다.
‘세한도’의 기증이 대단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물욕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도 잘 안다. 기증을 결심한 그 조차도 마음속에서 끓던 질긴 애정과 욕심을 잘 알기에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아예 자식들의 물욕을 끊으려, 접근 자체를 막은 셈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수다. 아름다운 기증이다. 다 맞다. 하지만 그 정도 어구로는 뭔가 다 채워지지 않는 미진함이 있다.
손씨의 기증은 ‘세한도’ 정신의 정수와 정확히 닿는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잣나무의 늦게 시듦을 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시련에 들어서야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기증자의 ‘시련’은 ‘세한도’를 향한 다함없는 애정이었을 게다. 그렇게 보면 마지막 애정마저 잘라낸 기증 결정은 물욕을 끊어내서 이기도 하고, 더 두면 스스로도 허물어질 것을 염려한 때문일지 모른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바보스러웠을 그의 선택은 그래서 오히려 현명하다. 욕심은 번뇌를 낳고, 번뇌는 분노를 만든다.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하지만 기증을 매듭지으면서 그의 가문은 ‘세한도’의 마지막 소장자로 영원성을 얻었고, 먼 뒷날 있을지도 모를 번뇌와 분노조차 단칼에 끊어내 버렸다.
‘세한도’는 이렇게 이름처럼 살고 있다. ‘세한도’만큼 인간적인 이야기가 가득한 그림이 또 있을까. 실상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는 추사가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였을 것이다. 다짐이었을 것이다. 귀한 책을 멀리서 구해다준 제자를 칭송하는 건 표면적이다. 추사가 얼마나 많은 원망과 한탄, 회한의 시간들을 그 말을 나침반 삼아 견뎌냈을까. ‘가난과 슬픔에도 (빳빳이) 머리를 쳐들고 생활’(린위탕 <생활의 발견>)해 나가고자 했던 문사의 기상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랬기에 ‘세한도’의 고결한 고독이 시공간을 건너 여러 마음들에 닿을 수 있었다. ‘세한도’의 간난신고(艱難辛苦·몹시 힘든 고생)는 추사의 간난신고이며, 지난 세월 이 땅과 그곳 인간들의 간난신고이기도 하다.
요즘 어쩌다 보면 사람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코로나19의 두려움은 그렇게 마음마저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세한’의 시련은 이처럼 ‘두려움’과 ‘고립’일 것이다. 손을 내밀어야 할 때 오히려 점점 움츠러드는 마음들을 덥혀줄 용기가 그리운 시절이다.
밝고 화려한 따뜻함만이 온기는 아니다. 어두운 골방에 있어도 낡은 담요 한 장이 주는 따스함이 있다. 때로 그 온기가 더 마음에 스민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연탄 한 장이 백마디 말보다 더 사무칠 수 있다. ‘세한도’에 녹아든 추사와 이 땅의 삶 이야기가 그러하고, 조건 없이 그 삶들 속으로 ‘세한도’를 돌려준 손씨의 기증이 그러하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건 이런 이야기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