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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당신이 옳다”

입력 2020.09.28 03:00

수정 2020.09.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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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피하고 싶은 것을 한 가지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골라야 하나. 질병을, 부도를, 노화를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다. 사건 지원을 위해 만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의외로 자주 듣는 대답이 있다. “그날이오. 되돌아가서 그날을 인생에서 지우고 싶어요.”

아무도 범죄 피해를 원하지 않는다. 뉴스에서만 듣던 일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일은 매일 일어난다. 지금도.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술자리를 마친 후 직장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A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존경하는 상사였기에 더 충격이 컸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A씨를 짓눌러 몹시 힘들다고 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지내던 A씨를 처음 만난 날, 나는 A씨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책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 “이번 사건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했던 것이 너무 화가 나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중학교 시절 하굣길에 낯선 사람에게 당했던 성폭력이 갑자기 확 떠오르며 몸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A씨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피해를 겪어야 했던 중학생인 자신을 이 사건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피해자는 ‘저항해야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힘 있게 말했다. “중학생 A양은 너무나 지혜롭고 훌륭하게 그 당시를 잘 살아나왔네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중에 가장 잘 대처한 것이에요. 기특하고 장해서 중학생 A양을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갑자기 A씨가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아무도 제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요. 왜 저는 제가 죽더라도 그때 소리치고 저항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렇게 A씨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신을 지켜낸 여중생 A양과 20년 만에 화해했고, 지금 이 사건은 온전히 가해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범죄 피해는 그 자체로도 삶을 갉아먹지만, 피해자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분노가 삶을 더 무력하게 만든다. 사건 지원을 하면서 법적 쟁점이나 이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피해자의 마음 바닥이다.

‘내가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그때 목숨이라도 내걸고 싸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내 인생이 망가져버렸어.’ 피해자와 함께 손잡고 마음 바닥에 깔려 있는 이 암세포 같은 생각들을 하나씩 없애면 놀랍게도 피해자는 힘을 낸다. 진실을 향해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이 일어난다.

곧 추석이다. 코로나19로 큰집 작은집 모두 모이는 일은 줄어들 것 같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인지라 평소 관심도 없던 친척 아무개, 고향 친구 아무개가 어떻게 지내는지 불현듯 궁금해질 수 있다. 얼굴 앞에서 과도한 궁금증을 물어오는 누군가에게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처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조차 할 여력 없이 고갈된 사람이 많다. 올 초부터 계속된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무기력과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여성 자살률은 올해 1~6월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7.1% 늘었다. 추석을 앞둔 오늘을, 목숨이 붙어 있다는 이유로 달갑잖게 맞이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지 물음은 무생물에만 하자. 우리가 이번 추석에 오랜만에 연락하는 누군가에게 전할 말은 “네가 옳다”라는 공감과 지지가 아닐까. 어릴 적 그때도, 지금의 당신도 여전히 옳다고. 그냥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추석이 지나도 아직 2개월 넘게 남은 올해의 당신은 하루하루 더 빛날 것이라고 진심을 다해 말해보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마음 바닥이 그 말 한마디에 혹시 꿈틀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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