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변방의 음모론자들이 미국 정치 주류로 나오고 있다. 오는 11월 3일(현지시간) 미 대선과 함께 열리는 연방 상하원 의원, 주지사·의회 선거에 온라인 음모론 집단 큐어넌(QAnon) 지지자 24명이 후보로 나선다. 은밀한 곳에서 ‘가짜뉴스’를 퍼뜨리던 이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제도권 정치로의 입성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로 파고드는 음모론자들
최근 미 ABC뉴스는 큐어넌을 공개 지지했던 인물 24명이 오는 11월 미국 선거에 후보로 나섰다고 보도했다. 22명은 공화당 간판을 달고 나머지 2명은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그중 가장 전국적 관심을 모은 인물은 조지아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는 마조리 테일러 그린(46)이다.
마조리 테일러 그린. CNN캡처
사업가 출신인 그린은 극우적 발언을 일삼으며 존재감을 알렸다. 민주당이 선전한 2018년 미국 중간선거에 대해 “우리 정부에 대한 이슬람의 침공”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민주당 지지자이자 억만장자 투자자인 조지 소로스를 나치에 비유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큐어넌의 주장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큐어넌이 주장해온 “사탄숭배자들이 정부와 기업,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를 막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가짜뉴스’의 핵심에 있는 큐어넌을 지지한 그린이 이번 선거에서 의석을 따낼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9월 초 조지아주 하원 선거에 나서기로 했던 민주당 후보 케빈 밴 어스달이 사퇴하면서 그린은 경쟁자 없이 승리를 점치고 있다.
공화당 내에서도 큐어넌을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비판이 일자 그린은 이제와서 큐어넌과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최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정보를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라면서 그간의 주장을 철회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CNN에는 “한 번도 내 입으로 큐어넌을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큐어넌과의 연관성 의혹에 발뺌했다.
조 레 퍼킨스. CNN캡처
이번 선거에서 그린과 같은 성향의 후보자들을 다수 만날 수 있다. 델라웨어주 상원 의석을 노리며 공화당 후보 경선에 뛰어든 로렌 위츠키도 ‘큐어넌’파 정치인이다. 위츠키는 대놓고 큐어넌의 상징인 Q가 새겨진 셔츠를 입기도 했다. 그는 ‘반이민’ 옹호론을 펼치며 미국 이민법을 뜯어고치겠다고 벼르고 있다. 물론, 선거가 임박하자 자신은 큐어넌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오리건주 의회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 공화당 후보 경선을 통과한 조 레 퍼킨스 또한 큐어넌이 퍼뜨리는 ‘가짜뉴스’를 신봉한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질문을 하는 기자를 향해 “코로나19 치명률은 병원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큐어넌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자가 퍼킨스가 입었던 Q 티셔츠의 의미를 묻자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사고에서 유래한 ‘질문법’의 의미로 Q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다”는 해명을 했다.
■음모론의 믹스&매치…극우와 팬데믹을 만나다
큐어넌의 역사는 길지 않다. 2017년 10월 미국 인터넷 게시판인 4챈에 ‘Q’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을 겨냥한 각종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탄생했다. ‘Q’는 수천명의 지지자가 생기자 자신이 기밀정보 접근 권한을 가진 백악관 내부고발자라고 주장했다. 큐어넌은 미 에너지부 최고기밀등급을 뜻하는 ‘Q’에, ‘익명의(anonymous)’란 단어를 붙여 만든 조어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에는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떠돌던 음모론들이 뒤섞여 있다. 엘리트 집단이 ‘딥스테이트(deep state)’라는 비밀 세력과 결탁돼 있고, 소아성애·인신매매 등을 즐기는 범죄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음모론은 한층 더 나아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이 클린턴 전 국무장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 등 딥스테이트 주요 인물에 맞서기 위해 비밀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상과학 소설 같은 주장들이 팬데믹(세계적 유행)을 만나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5G 전파로 코로나19가 퍼지고 있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이 유언비어는 ‘레무통엉라제(les mouton enrages·분노한 양들)’라는 프랑스의 음모론 사이트에서 시작됐지만 큐어넌의 주장과 뒤섞여 일파만파 퍼져갔다. 영국, 볼리비아, 페루 등에서는 5G 기지국을 파괴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페루에서 퍼진 ‘안티-5G’ 포스트. BBC캡처
‘백신 무용론자’들도 큐어넌의 가짜뉴스에 합류했다. 빌 게이츠와 같은 엘리트 집단에서 세계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코로나19 등 인류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근 독일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독일인 25%가 코로나바이러스 음모론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유럽 곳곳에서 봉쇄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같은 주장을 믿는다.
미국에서 시작된 큐어넌은 이제 세계를 무대로 뻗어가고 있다. 유튜브에서 독일어로 개설된 큐어넌 페이지의 조회수는 1700만건을 넘어섰고, 브라질에선 큐어넌 추종자가 170만명가량으로 추산됐다. 뉴욕타임스는 “음모론은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믿게 되는 것”이라면서 팬데믹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세계 곳곳에 음모론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가짜뉴스’를 부추기고 세력화하는 중심에 ‘극우정치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급우파 단체들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의 봉쇄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베를린 사회과학센터의 스웬 허터박사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떤 광범위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라며 극우 정치인이 이런 불만을 이용해 정치 세력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음모론의 사전적 정의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이다. 코로나19 위기의 돌파구를 ‘비밀스러운 무언가’에서 찾을 때 음모론은 음지에서 양지로, 음모론자들은 변방에서 주류로 활동무대를 넓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