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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악법인가…‘미투’부터 ‘배드파더스’까지

입력 2020.10.03 15:44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배드파더스’ 운영자인 구본창씨가 지난 1월 수원지법 앞에 서 있다. 권도현 기자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배드파더스’ 운영자인 구본창씨가 지난 1월 수원지법 앞에 서 있다. 권도현 기자

인터넷 사이트 ‘배드파더스’의 운영자 구본창씨(57)는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들의 신상을 공개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구씨는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 300여명의 실명, 나이, 거주지, 직업, 사진 등을 공개해 부모 5명이 구씨를 고소했다. 구씨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지만 지난 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인 수원고법 형사1부(재판장 노경필)는 재판을 잠정 중단했다. 재판부는 “헌법재판소가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인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에 대한 결정이 나올 때까지 이번 재판을 종결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밝혔다. 구씨가 ‘배드파더스’에 올린 부모들의 신상정보는 사실이었다. 구씨는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부는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헌 여부가 이 사건의 대전제가 된다고 판단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란 무엇인가

한국은 누군가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그 내용이 사실이라도 처벌한다. 형법 제307조 1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법이다.

언론사나 기자는 사실을 취재해 보도하는데도 왜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지 않을까. 형법 제310조에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한다. 언론 보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봤을 때 ‘진실한 사실’이고 ‘공공의 이익’이라는 목적이 있었다면 처벌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다고 드러나도 당시에는 사실이라고 믿을 만했다면 처벌하지 않는다. 대법원 판례는 “적시된 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증명이 없더라도 행위자가 진실한 것으로 믿었고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없다”고 한다.

대법원은 언론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해 판단한다. 앞서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씨에 대해서도 1심인 수원지법 형사11부(재판장 이창열)는 ‘공공의 이익’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양육비 미지급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다수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며 “피고인의 활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최근 다른 인터넷 사이트 ‘디지털 교도소’는 사법부가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고 비판하며 살인·아동학대·성범죄자의 신상을 파헤쳐 공개했다. 운영자 ‘박소장’은 지난 7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사실적시 연쇄 명예훼손범’이라고 생각한다”며 “불법인 것을 알지만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소장은 신상공개 기간을 30년으로 정해 범죄자 100여명의 이름, 나이, 직업, 주소, 전화번호 등을 공개했다.

다만 디지털 교도소에는 허위사실도 있었다. 지난 6월 성착취 영상을 구매하려 했다며 채정호 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신상이 공개됐지만 경찰 수사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지인 사진을 성착취물에 합성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신상이 공개된 한 대학생은 억울하다고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22일 1기 운영자인 30대 남성이 베트남에서 검거됐고, 24일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사이트 전체를 차단했지만 인터넷 주소를 옮겨 활동하고 있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디지털 교도소’ 화면. 인터넷 화면 캡처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디지털 교도소’ 화면. 인터넷 화면 캡처

■“민주국가에서 진실 말해야” “개인의 인격권도 중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헌법재판소가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2017년 8월 한 시민은 자신의 반려견이 수의사에게 잘못된 치료를 받은 뒤 피해를 입었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물을 올리려고 했지만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시민은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때문에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지난달 10일 이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었다. 청구인 측 참고인 김재중 충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주국가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데 제한을 둬서는 안 된다”며 “만약 진실이 가려진 채 형성된 외부적 명예가 있다면 허명에 불과하다. 진실한 사실의 적시로 손상되는 것은 잘못된 허명이다. 허명을 표현의 자유를 위축하면서까지 보호해야 할 법익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 측 참고인 홍영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인의 인격권도 헌법상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기본권”이라며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명예는 의사소통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자격이다. 개인의 명예가 완전히 상실된 상태라면 개인의 반론은 영향력 있게 작용하기 어렵고 한 번 침해된 명예는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헌재가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는 것은 처음이다. 다만 헌재는 비슷한 조항인 정보통신망법 제70조에 대해서는 2016년 2월 재판관 9명 중 합헌 7명 대 위헌 2명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이 조항은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씨에게 적용된 혐의다.

당시 헌재는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폐해가 심각하다”며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 명예훼손적인 표현을 규제하고 인격권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2018년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에 확산될 당시 가해자가 피해자를 맞고소해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돼 비판받았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제한하는 형법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처벌 대상에서 ‘성폭력 피해사실 적시’를 제외하는 법안을 냈다. 같은 당 표창원 전 의원은 성립요건에 ‘비방 목적’을 추가하는 법안을 냈다. 이혜훈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도 처벌하지 않는 사유에 ‘당사자의 법익 침해와 관련된 사안’을 추가하는 법안을 냈다. 이 법안들은 모두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9월1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공개변론을 열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가 지난 9월1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공개변론을 열었다. 연합뉴스

■세계적으로 처벌 국가는 손꼽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비범죄화 논의와 대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많지 않으며, 더욱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다. 주요 국가 중에서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등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있지만 성립요건을 제한한다.

미국은 대부분 주에서 명예훼손죄에 대해 민사 손해배상으로 해결한다. 일부 주에서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지만 실제 적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고, 허위사실에 대해서만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한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진실한 사실이거나 피의자가 진실로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명예훼손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일본은 한국처럼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지만 친고죄(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기소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한다.

2015년 11월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ICCPR)는 한국 정부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고 명예훼손죄를 형사처벌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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