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세대’는 전쟁 직후 태어나 고도성장기 속에서 자라난 세대를 일컫는다. 한국에선 대체로 한국전쟁 이후인 1955~1964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1970년대 경제개발, 1980년대 민주화운동,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등을 청년기와 장년기 초반에 겪었다.
올해는 이 세대의 맏이인 1955년생이 만 65세로 법적인 노인에 처음 진입한 해다. 올해 노인이 된 베이비붐 세대는 약 71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세대는 그간 ‘경제발전의 주역들’ ‘은퇴 앞둔 아버지들’에 초점을 두고 조명됐다. 이 세대 여성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베이비붐 세대 여성 중엔 가족 돌봄노동을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보는 등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림자처럼 잘 드러나지 않았던 베이비붐 세대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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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집사람, 엄마, 이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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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없다 보니 모든 게 불편했지요. 자식들과도 대화가 잘 안 됐고요. 한이 되고 후회가 됩니다.”
1961년생 A씨(59)가 지나간 세월을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경기 수원시의 한 음식점에서 오후 5시부터 오전 2시까지 9시간씩 서빙과 설거지를 한다. 반복된 노동에 손은 거칠어졌다. A씨는 “30살부터 시작해 20년 정도를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며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어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오빠와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자신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마칠 수 있었다. 부모는 오빠와 남동생을 학교에 보냈지만, A씨에겐 집안일을 시켰다. 천식으로 몸도 좋지 않았다. 그는 “그때는 모두가 어려웠다. 남자들은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고 학교를 보냈는데, 여자들은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혼 후엔 ‘독박 육아’를 했다. 그러다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아들 두 명을 낳고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안 돼 일을 시작했다”며 “시부모의 몸이 편찮으시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니 돈이 필요해 스무곳 이상의 식당을 옮겨다니며 일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살림과 생업전선에 뛰어든 삶이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A씨는 “배움이 짧은 채 일하다 보니 아이들과 대화도 통하지 않고 (자녀들 마음도) 이해를 못해준 것 같다”며 “못 배운 것이 한이 돼 지금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뜻은 몰라도 간판 글을 읽을 때 스스로 뿌듯하다”고 말했다.
가족 내의 자원이 남성에게 집중되는 것은 이 세대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통계청이 2010년 조사한 ‘사회조사를 통해 본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을 보면 베이비붐 세대 중 남성과 여성의 최종 학력은 차이를 보였다. 남성 대졸자는 41.2%였으나 여성은 30.5%였다. 여성들의 대학 진학 포기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형편’(77.5%)이었고, ‘부모 등의 사고방식’(8.7%), ‘집안 돌봄’(5.5%)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경기도청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1964년생 B씨(56)는 직장에서 “여사님”으로 불린다. 청소 일을 시작한 지 10년쯤 됐다. 그전엔 식당을 돌며 10년을 일했다. 살림 경력은 30년차다. B씨는 “자식들 다 크고 나가는 돈이 없으니 이제야 살림이 좀 피는 것 같다”고 말했다.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큰언니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베이비붐 세대의 맏이인 언니가 공장에 취직해 매달 생활비를 보내줬다. B씨는 결혼 후 IMF 외환위기로 남편 사업이 하락세를 겪으면서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전세금과 월세를 못 구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이사만 열 번이 넘는다. “26살에 결혼해 살림과 육아만 했어요. 기술이 없으니 단순노동만 하게 됐지요. 지금 청소 일자리는 정년이 65세까지인데 그때까지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전 6시 도청에 출근해 오후 3시30분에 퇴근하는 B씨는 “아무래도 여자이다 보니 집에 가도 기본적인 가사일은 다 내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퇴근 후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셈이다. 그는 “옛날 여자들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언니를 생각하면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도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 나온 게 아닌가 싶다”며 “이제는 남녀가 살림과 육아를 같이해야 한다. 내 딸들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제일평생학교에서 진행된 중학교 졸업 학력인정 수업에 참여한 어르신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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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꿈꾸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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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의 여성들은 대체로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 살림과 돌봄노동을 하면서 ‘안사람’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청소년기를 지나 노년에 들어서기까지 사회는 변했다. 평생 ‘그림자 노동’만 해야 했던 이 세대 여성들 중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찾아가려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지난달 25일 찾은 경기 수원제일평생학교에는 중학교 졸업 학력 인정 수업을 듣기 위해 2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코로나19로 10여명씩 2개 반으로 나눠 수업이 진행됐다. 학생들 대부분은 60세 이상으로, 젊은 시절 집안 살림과 돌봄노동 등에 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늦깎이 중학생들이다. 이 학교의 전체 학생 250여명 중 97%가 여성이다. 박영도 교장은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이 학생의 대부분”이라며 “젊어서는 식구들을 위해 희생한 분들인데, 더 늦기 전에 배우겠다는 욕구로 찾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 중학생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1960년생 C씨(60)는 “그때 여성들은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안 배워도 될 것 같았다. 시대가 변하니 ‘아는 게 힘’이더라”고 말했다. 글을 몰라 사기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식당 자리 계약을 하면서 계약금을 줬는데, 알고 보니 부동산에 앉아있던 사람이 주인이 아니었다”며 “당시 계약서는 전부 한문이라, 읽을 줄 모르다 보니 사기를 당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 용인시에서 고깃집을 하는 C씨는 5남매가 대학을 졸업해 일자리를 구한 뒤, 제2의 인생으로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있다. “‘다 때가 있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어요. 못 배운 게 한이 돼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시켰지요. 대학에서 공부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뒤에는 나같이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해 재능기부와 봉사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오는 11월 1983년생 아들을 결혼시키는 1958년생 D씨는 예비 며느리에게 시집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대 초반에 결혼해 30대까지 시부모를 모신 그는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돼 몸이 힘든데도 집안일과 돌봄노동을 해야 했다. 제사도 많고, (시부모가) 옷장사를 하신 탓에 종업원 8명의 식사도 직접 해야 했다”며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며느리에겐 자주 연락하지도 않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둘이서 잘살기만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미화원을 하고 있는 1964년생 B씨가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B씨는 경기도청에서 10년째 미화원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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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노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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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의 여성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장벽을 마주하고 있다. 대체로 소득이 불안정하고 연금 수령액도 낮은 편이다.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 빈곤한 노후를 보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통계청이 지난 2일 발간한 ‘2020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지난해 베이비붐 세대 여성 기초생활수급자는 98만9000여명으로 남성 기초생활수급자 80만4000여명보다 18만5000여명 많았다. 사정은 10여년 전 조사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통계청이 2009년 낸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여성(39.6%)은 남성(23.9%)에 비해 임시직·일용직 노동자일 확률이 15.7%포인트 높았다. 또 2010년 통계개발원의 ‘베이비붐 세대의 현황 및 은퇴 효과 분석’을 보면 베이비붐 세대의 남성 88.5%, 여성 60.3%가 취업자로 분류됐다.
여성들이 비공식적 영역의 일을 하고, 공식적인 영역이라도 가족 자영업을 보조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노후생활의 경제적 대비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박성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 세대의 여성들은 대체로 주부가 많았기 때문에 소득이나 연금가입, 연금액 등 경제 기반이 남성보다 약해 노후 빈곤에 직면할 수 있다”며 “베이비붐 세대 여성 중에 홀로 노년을 맞는 이들이 늘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와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연구위원은 “독거하는 노년층이 거실은 공유하고 각자의 방에서 거주하는 등 주거 스타일에 변화를 주거나, 지자체에서 이뤄지는 노인 일자리 창출을 장기적으로 진행하는 방법 등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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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동성 기자 estar@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