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현지시간)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레포르마 에비뉴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이 철거된 빈 받침대를 둘러싼 가림막 앞에서 한 원주민이 공연을 하고 있다. 멕시코시티 시 당국은 전날 복원을 이유로 콜럼버스 동상을 철거했다. 멕시코시티|AFP연합뉴스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날(1492년 10월12일)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인 12일(현지시간) 미국과 중남미 곳곳에서 유럽 식민주의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거리에 나온 각국 시민들은 이날을 ‘원주민 분노의 날’이라고 했으며, 인종주의를 끝내고 원주민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5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의 가혹행위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번진 인종차별 항의시위가 ‘역사 바로잡기’로 이어진 것이다.
AFP·AP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밤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선 300여명이 “콜럼버스의 날이 아니라 원주민 분노의 날”이라며 거리 시위를 벌였고, 일부 시위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동상을 무너뜨렸다. 노예제를 폐지한 링컨 전 대통령도 원주민 처형에 가담한 인종주의자였다고 시위대는 비판한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공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동상이 넘어져 있다. 포틀랜드|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루스벨트·링컨 동상 철거를 언급하며 “저 짐승들을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며 맹비난했다.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 전역에서 식민주의·인종주의·노예제 관련 인물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철거되거나 훼손됐다. 노예제 상징인 남부연합기 퇴출 움직임도 일었다. 이에 찬반이 갈리면서 ‘역사 논쟁’으로 번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남부연합기 게양 옹호 등 ‘백인우월주의 역사의 편’에 섰다.
미국에서는 “신대륙 발견”을 기리기 위해 콜럼버스의 날을 1934년부터 연방 공휴일로 기념해왔다. 하지만 유럽·백인들의 원주민 착취와 학살의 역사를 반성하고 교육하는 날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고, 플로이드 사건 이후 비판 여론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1990년 사우스다코타주를 시작으로 현재 미 14개주 130여개 도시가 ‘콜롬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현재 추세라면 이같은 주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중남미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콜롬비아 남서부 도시 칼리에선 이날 원주민 수천명이 초록색과 빨간색의 전통복장 차림으로 행진에 나섰다. 현지 원주민단체 소속 프랭키 레이노사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우리 영토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족말살”이라고 비판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 광장에서도 현지 최대 원주민 집단인 마푸체족을 옹호하는 시위대 수백명이 경찰과 충돌했다. 마푸체족은 조상들이 남긴 남부지역 땅을 되돌려달라며 오랫동안 칠레 정부와 대치해왔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도 이날 콜럼버스 동상에 ‘원주민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페인트가 뿌려졌다.

12일(현지시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에 붉은색 페인트가 뿌려져 있다. 볼리비아 시민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 날을 ‘탈식민의 날’로 기념했다. 라파스|EPA연합뉴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선 콜럼버스 동상이 전날 자취를 감췄다. 시위대가 동상을 철거할 가능성에 대비해 시 당국이 ‘복원’을 핑계로 미리 치워둔 것이다. 클라우디아 세인바움 멕시코시티 시장은 “동상이 복원되는 동안 콜럼버스상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 다 같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며 스페인 침략의 역사 상징물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멕시코 남서부 미초아칸주에선 푸레페차족 원주민들이 공동체 거주지로 들어오는 초입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들은 성명에서 “우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땅은 침략당하고 약탈당했지, 발견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