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청와대에 누가 있어 도서정가제를 흔드나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청와대에 누가 있어 도서정가제를 흔드나

입력 2020.10.24 03:00

1945년 가을, 33세 정진숙(1912~2008, 을유문화사 창립자)은 출판업을 해보자는 주위의 권유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이때 집안 어른인 정인보 선생(1892~1950)이 조언을 했다. “36년 동안 일본놈들에게 빼앗겼던 우리 조선의 문화유산, 언어, 문자, 이름까지 되찾으려면 36년이 다시 걸리네.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인 사업이 출판인데 왜 망설이고 있는가.”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이후 정진숙은 출판 외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글로 쓰인 책이 없었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는 작가도 없었다. 어쩌다가 입수한 원고는 문맥이 통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출판사 편집자들은 우리말을 찾아내어 글에 맥(脈)이 흐르도록 바로잡았다. 그들이 갈고닦아 놓은 언어가 존재한 덕분에 저자들은 비로소 집필을 할 수 있었다. 출판은 이렇듯 잃어버린 우리 것을 찾아내는 숭고한 사업이었다.

정인보 선생의 말대로 우리글과 말을 찾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이 예견한 대로 해방 이후 30여년이 흐르자 한글이 우리글로 돌아왔다. 우리 출판계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출판계에 질적 변화가 있었다. 책이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는 민주화투쟁의 도구가 되었고, 자유와 인권을 확장하는 광장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70년대와 80년대의 실험과 실천은 민주화운동·민중운동·민족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고, 이 운동과정과 연대하는 출판은 그 운동들의 논리와 정서를 모색하고 창출하는 결정적인 광장 및 힘이 되었던 것이다. 출판은 척박한 상황에서 그 척박한 상황의 제 조건을 극복해내는 논리 및 실천적인 의식을 키워냈다.”(출판인 김언호)

책을 통해 다양한 이념, 가치, 욕구들이 분출되었다. 그것들은 결국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총체적인 힘이었다. 당시 출판계에 뛰어든 교수, 언론인, 학자들은 평등과 자유의 개념을 확장하며 암울한 시대에 희망과 용기를 심었다. 그들이 걸러낸 시대정신이 공동선으로 물결쳐 퍼져나갔다. 정신사를 흔드는 바람이었다. 그들의 활약은 ‘출판운동’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우리 현대사는 출판계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히 우리가 쟁취한 민주주의에는 출판인의 열정과 숨결이 스며있다. 비록 현실이 남루하고 갈 길이 험하지만 출판인들은 이런 자부심 위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출판인들을 실망시키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촛불정권’이 출판계의 숨구멍인 도서정가제(도정제)를 흔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도정제가 붕괴되면 서점들이 쓰러지고, 그다음에는 출판사가 무너진다. 결국 그 피해는 독자에게 돌아간다. 또 우리에게는 도정제가 무너지자 출판 생태계 또한 속절없이 붕괴했던 과거가 있다. 책이 서점 대신 저자에서 나뒹구는 참담한 현장을 목격했다.

도정제가 실시되면서 책은 비로소 책으로 돌아왔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도정제로 출판 생태계가 안정되자 동네 서점이 늘어났다. 다양한 목소리가 담긴 모험적인 책들이 등장했다. 신기하고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한 도정제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믿고 있다. 누군가 ‘소비자 후생’을 거론하며 도정제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청와대에 어떤 이들이 모여 있어 출판 생태계를 교란시키는가.

출판인들은 책 속에 세상을 담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맑고 당당하다. 그렇기에 박근혜 정권도 귀를 열어 도정제의 문제점을 보완하였다. 촛불정권은 뭐가 두려운 것인가. 출판계에 어떤 불만이 있는가. 출판인들은 완전 도정제를 이루지 못할 바에는 현행 제도에서 털끝 하나도 건들지 말라고 일갈한다. 책을 고깃덩어리쯤으로 여기고 출판인을 장사꾼으로 바라보는 천박한 무리와는 절연하겠다는 뜻이다.

지난 13일 책의날을 기념하는 출판문화유공자 시상식이 있었다. 이날 대통령 표창을 받는 출판사 대표가 가슴에 ‘도서정가제’라는 글귀가 새겨진 옷을 입고 시상대에 섰다. 결코 웃을 수 없는, 통쾌하지만 그래서 아픈 장면이었다. 이제 그 간절함과 시퍼런 결기에 정부가 답해야 한다. 내달 20일이면 현행 도정제가 일몰을 맞는다. 이번 갈등이 대통령 선거공약인 완전한 도정제 시행으로 귀납되는 행복한 결말을 기대해본다. 이 땅의 책과 출판인들에게 평화를….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