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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숨 쉴 공간’과 메마른 세계관

입력 2020.10.26 03:00

수정 2020.10.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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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이재명 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등 피고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지난 7월 대법원이 선고한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대법원 판결을 읽다가 ‘숨 쉴 공간’이라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문장을 옮기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 즉 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인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다시 어느 보수논객이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에게 사용한 ‘종북’ ‘주사파’라는 표현을 두고 2018년 10월에 선고된 다른 전원합의체 판결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숨 쉴 공간이란 글귀가 등장한다. 2011년 광우병에 관한 <PD수첩> 보도 사건에서 내려진 판결에도 이 용어가 쓰였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아쉽게도, 이런 멋진 글귀는 어디에서 배워오지 않는 한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숨 쉴 공간(breathing space)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1963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대 버튼 사건 판결에서 월리엄 브레넌 대법관이 처음 쓴 것이다. 그는 언론의 자유에 관한 이정표적 판결로 꼽히는 1964년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사건의 판결에서도 같은 표현을 썼다. 다른 촌철살인적인 구절로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다. 우리 헌법재판소의 1990년 결정 중에 나오는 이 말은 이미 1918년 미국의 홈스 대법관이 솅크 대 미합중국 사건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숨 쉴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이나 기억력, 또는 언어 자체가 가지는 표현력의 한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허여하는 공간이다. 1964년 뉴욕타임스 판결에서 숨 쉴 공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선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돕기 위해 인권활동가들이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광고가 문제되었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의 경찰국장인 설리번은 그 광고의 기술이 사실과 다르며 이것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하여 뉴욕타임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 실제로 광고에 나온 주장은 여러 점에서 사실과 달랐다. 얼마나 달랐을까? 광고 중 문제된 부분은 이렇다. “학생들은 주 의사당의 계단에서 ‘아메리카’라는 노래를 부른 뒤 학교에서 쫓겨났고, 산탄총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트럭 여러 대 규모의 경찰관들이 대학교 교정을 에워쌌다. 전체 학생들이 재등록을 거부함으로써 항의하자, 그들을 굶겨서 굴복하게 하려고 식당이 봉쇄되었다. 남부의 (인권)침해자들은 킹의 평화적 항의에 위협과 폭력으로 답했다. 그들은 킹의 집을 쳐들어가서 그의 부인과 아이를 거의 죽게 만들었다. 킹의 신체에 폭행을 가했고, 그를 일곱 번이나 체포했다.” 그런데 사실은 이랬다. ①킹 목사는 세 번 체포되었다. ②시위 학생들이 부른 노래는 국가였다. ③학생들이 쫓겨난 것은 몽고메리 군법원의 간이식당에서 음식 제공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④전체 학생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 ⑤그들의 항의 방법은 수업 거부였다. ⑥무장한 경찰관들은 단지 교정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을 뿐이고 학생들을 굶겨 죽이려고 한 일도 없었다.

이재명 지사 판결문 속 ‘숨 쉴 공간’
표현의 한계에 이해·통찰 허용 뜻
모든 말에 일절 오류 용납 않으면
정치적 발언 영역 보호받기 어려워

숨 쉴 공간이란 말 그대로 숨 쉬어 살아남을 공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이다. 모든 말이 완벽하게 사실에 맞아 들어가야 하며,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호령이 내리고 육모방망이가 춤추는 사회엔 숨 쉴 공간이 없다. 정치적 발언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공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혜가 최고법원의 판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상에서의 절실한 경험을 법리로 승화시키는 법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변호사로서 답답해지는 순간은 판관의 판단이 정확성의 요청을 넘어 무릇 인간사에서 늘 있게 마련인 오류를 일절 용납하지 않으면서 맥락을 무시하고 메마른 세계관으로 사건을 재단하는 것을 목격할 때다. 성인지감수성이란 것도 성범죄 사건 피해자에게 이런 공간을 허락하는 것을 뜻한다. 왜 성폭행을 당한 바로 그날 신고하지 않았느냐, 왜 그 사건 후에도 가해자를 전과 같이 대했느냐 따위의 비난으로 가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옳을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대법원 판결문에 설시된 대로, 자유로운 토론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부정확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 또는 “부분적으로 잘못되거나 과장된 표현”에 바로 법적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숨 쉴 공간이 우리 사회의 완고한 엄숙주의를 덜어내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 보고 싶다. 대통령 후보를 공산주의자라고 일컬은 행위를 단죄한 하급심 판결에 장차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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