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의 법률 조언
임종헌 전 차장
행정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소송과 관련된 서류를 사법부 소속인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검토해줬다면 법조인의 흔한 ‘법률 조언’으로 볼 수 있을까.
사법농단 사건에는 행정부가 법원 재판에 낼 소송 서류를 법원행정처가 사전에 받아 검토해준 대목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는 외교부 의견서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처분 취소소송에서는 고용노동부 재항고 이유서를 법원행정처가 미리 봐줬다. 단순히 사건 정보와 일반적인 법리, 전망을 알려주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
법정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피고인들은 이를 ‘조언’ ‘안내’ ‘자문’과 같은 단어들로 포장한다. 법조인은 으레 주변 요청을 받아 법률 조언을 많이 한다고도 한다. 법관윤리강령 5조 3항은 법관이 정보 제공은 물론 법률 조언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재판에 영향을 미치거나 공정성을 의심받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 외교부 의견서 초안 검토해준 행정처
행정부가 재판에 낼 소송 서류들
‘법원행정처가 사전 검토’ 드러나
외교부가 의견서를 제출하면 그것을 계기로 대법원이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피해자들 승소인 기존 판결을 일본 기업들 승소로 바꾸려 했다는 게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소사실이다. 재판에서는 의견서 제출을 누가 주도했는지를 두고 책임 공방이 벌어진다.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외교부 인사들이 서로를 겨냥한다.
“제가 아는 한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처음부터 한 번도 없습니다”(조태열 전 외교부 2차관), “의견서가 어떤 의미를 갖고,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는지 저는 지금도 모릅니다”(김인철 전 외교부 국제법률국장).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은) 대법원 또는 법원행정처 요구도, 청와대 지시, (일본 기업들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로비 차원에서 추진된 것도 아니라는 게 명백합니다. 어디까지나 외교부 자체의 강력한 희망이었음이 드러납니다.”(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
지난 8월21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조 전 차관의 태도는 유독 단호했다. 혹시나 외교부가 일본 기업들에 유리한 의견서를 낸 게 공개되면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외교부는 의견서를 내기 싫었다고 했다. 심지어는 냈다는 형식만 갖추기 위해 내용이 없는 ‘맹탕 버전’ 의견서까지 강구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외교부 의견서는 초안부터 법원행정처에 전달됐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김인철 전 국장 등의 증언에 의하면 2015년 8월 조 전 차관과 임 전 차장 등이 만난 자리에서 조 전 차관이 ‘의견서 초안을 줄 테니 의견을 달라’고 했고 그 후 의견서 초안이 법원행정처로 건네졌다. 이 전 실장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의견서에 연필로 무언가를 써 수정하고, 조 전 차관에게 돌려주는 것을 봤다고 했다.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이 회의에서 실무진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의견서 초안을 대법원에 보내 검토를 받자고 했다는 외교부 쪽 증언도 있다.
‘원·피고 당사자가 있는 민사소송에서 원고 몰래 법원행정처가 피고 측 의견서를 검토한 것은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한 것 아니냐’는 검사 질문에 이 전 실장이 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의견서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라 (한쪽) 편을 든다고 생각은 안 했습니다. (…) 그런데 저희가 외교부 의견서를 봐준 건 적절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검찰은 2016년 9월29일을 주목한다.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지 않자 임 전 차장이 조 전 차관을 찾아가 일종의 ‘독촉’을 한 때다. 당시 대화를 기록했다는 외교부 김모 사무관 작성 문건을 보면 “(외교부가 의견서를 낼 경우) 결과는 장담할 수 없으나 전원합의부 회부를 추진하려고 함”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재판 개입이 아닌 법률 조언일까.
“임 전 차장이 실제 재판 절차를 그렇게 진행하기로 협의한다고 이해했나요, 아니면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 시기 및 작성 방법과 관련해서 ‘법률적 조언’을 한다고 이해했나요?”(양 전 대법원장 측 변은석 변호사)
“조언이 아니고요. 의견서를 빨리 내달라는 게 임 차장이 저에게 요구한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빨리 의견서를 내면 자기도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게 그날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구체적으로 몇 주가 걸리고, 11월 초까지는 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제가 기억하는 것이고요.”(조 전 차관)
■ 김앤장 내부 문건 “대법원장, 프로젝트 잘 아셔”
사법농단 사건으로 문제 불거지자
양승태·외교부 “네 탓” 책임 공방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 논의 뒤에는 또 하나의 의견서가 있다.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김앤장의 의견서다. 임 전 차장은 김앤장에도 의견서 제출 시기, 내용 등을 코치했다. 김앤장 한상호 변호사는 검찰 조사에서 김앤장의 의견서 초안을 임 전 차장에게 보냈고, 임 전 차장이 의견서 제목을 ‘요청서’에서 ‘촉구서’로 바꿨다고 진술했다. 김앤장 내부 e메일에는 “대(대법원)로부터 의견서 제출 촉구서에 민사소송규칙을 명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음(수정본 수령함)”이라고 나온다. 김앤장 문건에는 이런 문장도 등장한다. “대법원장께서는 프로젝트의 과정을 잘 알고 계시다.”
일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당시 김앤장 소속 변호사로 강제징용 사건 실무를 담당했던 김모 교수는 지난달 16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나와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 자체를 몰랐다고 증언했다. 한 변호사의 이니셜과 ‘보안 유지’라고 쓰인 문서가 어느 날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어 그때서야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알았다고 했다. 오히려 실무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어느 나라 외교부냐’는 여론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교부 의견 활용을 부정적으로 논의한 상태였다고 했다.
결국 외교부는 의견서를 냈지만, 끝까지 마지못해 낸다는 외관을 만들려고 했다는 게 조 전 차관 증언이다. 조 전 차관은 “(대법원에서) 외교부 의견서를 받아달라는 (김앤장) 요청이 있으니 의견서를 보내주기 바란다는 공문이 올 줄 알았는데, 요청이 있으니 참고로 알려드린다는 공문이 왔다”며 “그래서 우리도 회신 공문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참고로 자료를 보내드립니다’라는 식으로 의견서를 보냈다”고 했다. 외교부는 ‘자료 송부’라는 건조한 형식으로 법원행정처에 의견서를 보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 정부 서류 받은 심의관 “무섭고 당황”
행정부 서류 받았던 당시 심의관
“균형 있는 검토 아냐…부적절”
법관 강령선 법률 검토 엄격 제한
‘손본 서류’ 법원 제출 결국 논란
지난 16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는 2014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었던 조원경 판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조 판사 증언에 의하면, 임 전 차장이 어느 날 ‘업무에 필요하다’면서 노동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의 효력을 정지한 서울고등법원 결정의 ‘문제점’을 검토해오라고 지시했다. 여기에서부터 조 판사는 껄끄럽게 느꼈다.
“한쪽 방향(노동부 주장이 맞다)으로 결론을 내려놓고 법리 검토를 해야 되니까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차장님의 업무 스타일상 ‘대외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 이런 논리가 필요한가 보다’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까지 정리를 하는 게 적절한지 싶었습니다. 시키니까 하기는 했지만 재판부가 안다면 기분 나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 객관적으로 균형있게 검토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조 판사)
얼마 지나지 않아 임 전 차장은 다시 조 판사를 불렀다. 이번엔 ‘재항고 이유서’라고 쓰인 문건을 줬다. 재항고인은 고용노동부 장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임 전 차장이 ‘빨리 봐라’라고 말한 것 같다고 조 판사는 증언했다. ‘전교조 항소심 효력정지 결정 재항고 이유서 검토’ 문건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조 판사는 당사자 일방, 그것도 행정부의 소송 서류를 검토하는 게 당황스럽고 무서웠다고 했다. 조 판사가 쓴 2개의 문건은 임 전 차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와 조 판사가 사용했던 법원행정처 컴퓨터에서 모두 발견됐는데, 파일명이 달랐다. 조 판사 컴퓨터 문건의 파일명은 ‘건강검진 안내 첨부문서.hwp’ ‘검찰 명단.hwp’로 돼 있었다.
“전교조 효력정지 결정과 재항고 관련 일을 (제가) 했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문서를 지워버리면 나중에 차장님이 찾으실 수도 있기 때문에 이름을 덮어씌워서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조 판사)
통상적인 법원행정처 문건과 달리 재항고 이유서 검토 문건엔 정의의 여신을 형상화한 사법부 로고도, 작성자 명의도 없었다. 또 ‘법률 조언’이 나왔다.
“법관들이 법관 윤리와 별개로 주위 사람들에게 소장이나 판결을 받으면서 읽어보거나 의견을 달라는 말 많이 듣잖아요. 임종헌도 그런 차원에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자기는 법리적으로 잘 모르고 바쁘기도 하니까 증인에게 ‘어떤지 한번 봐주세요’라고 했을 수도 있지 않나요? (…) 주저되고 부담스러운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무서울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요?”(양 전 대법원장 측 이상원 변호사)
“차장님은 가볍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저처럼 무겁게 받아들였더라면 여러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냥 빨리 한 번 봐달라고 한 것은, 차장님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부탁을 받으셨고 저한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저로서는 소송 당사자의 서류를 미리 받아서 검토시킨다는 게 무서웠고 당황했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무섭다고 느낀 것은 맞습니다.”(조 판사)
검찰은 조 판사가 검토한 재항고 이유서가 청와대를 통해 노동부로 넘어갔고, 실제 법원에 제출된 것으로 파악했다. 조 판사와 같은 시기 법원행정처에 있었던 이국현 판사는 증인으로 나와 심의관으로 근무할 때 남의 소송 서류를 검토해준 경험이 없다고 했다.
2012. 5. 24. 판결 관련 대법원의 새로운 논의 전개를 위해 계기가 필요한 바, 동 계기 마련을 위해 아미쿠스 쿠리에 제도를 활용하여 정부가 동 문제에 대해 강제징용 관련 여러 가지 상이한 판결과 다양한 전후배상 문제 처리 관련 외국 사례를 제출해 주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으나 이를 기초로 전원합의부 회부를 추진하려고 함.
외교부로부터 의견서 제출절차 개시 시그널을 받으면 대법원은 피고 측 변호인으로부터 정부 의견 요청서를 접수받아 이를 외교부에 그대로 전달할 예정이며, 이러한 절차에는 일주일가량 소요될 것으로 예상함. 이후 외교부에서 대법원의 공문 접수 후 3~4주 정도 뒤에 의견서를 제출해 주면 이를 기초로 법원 내부절차를 개시하고자 함.
법원 내부절차는 ‘전원합의부’ 회부 → 내부 토의(공개변론 여부 포함) → 판결 순으로 진행.
4년 전 내려진 판결을 바로 뒤집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현임 대법원장 임기 중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교부가 의견서를 늦어도 11월 초까지 보내주면 가급적 이를 기초로 최대한 절차를 진행하고자 함.
■문건에 대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측 이상원 변호사 반박
“굉장히 위험한 증거다. 임종헌 전 차장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 문건에 적혀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외교부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외교부 문서들은 실제 내용이 그대로 진술되거나 기재된 게 잘 없다. 외교부가 나중에 책임 추궁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고려해 항상 윤색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이 외교부에 의견서 제출을 사실상 통보했다고 주장하는데, 문건 중 ‘추진하려고 함’ ‘개시하고자 함’ ‘진행하고자 함’이라는 문구를 보면 과연 통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가능성이 있다는 한마디, 보통 이러이러한 절차가 진행된다고 안내한 것을 문건에 적은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