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이길보라·이다울, 단단한 여성들의 경계 없는 부지런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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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나란히 책을 펴낸 이슬아 작가(왼쪽부터), 이다울 작가, 이길보라 감독. 이들은 10대 후반 ‘어딘글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영경 기자

이슬아·이길보라·이다울, 단단한 여성들의 경계 없는 부지런한 글쓰기

학자금 대출을 갚겠다며 독자를 직접 모아 ‘독자와의 직거래’를 성공시킨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

농인 부모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를 만들었으며 할머니-엄마-자신으로 이어지는 ‘낙태의 경험’을 다룬 영화 <우리의 몸>을 제작 중인 이길보라.

원인불명의 만성질환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책 <천장의 무늬>를 펴낸 이다울.

이들이 쓴 책 ‘어딘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글쓰기 스승 ‘어딘’이다.

비슷한 시기 나란히 책을 펴낸 이슬아 작가(왼쪽부터), 이다울 작가, 이길보라 감독. 이들은 10대 후반 ‘어딘글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영경 기자

비슷한 시기 나란히 책을 펴낸 이슬아 작가(왼쪽부터), 이다울 작가, 이길보라 감독. 이들은 10대 후반 ‘어딘글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영경 기자

“이 긴장감 넘치는 시간은 서로를 쑥쑥 키웠다. 잘 모르는데 아는 척하고 쓰다가 틀린 문장들, 무례하거나 폭력적인 문장들, 우스운 포즈를 취한 문장들, 비효율적인 문장들, 게으른 문장들, 느끼한 문장들, 그 밖에도 온갖 문제를 가진 문장들을 함께 살폈다. 이 우정은 질투와 감탄과 존경을 원동력 삼아 계속되었다.”

이슬아는 신작 <부지런한 사랑>에서 ‘어딘글방’에 대해 이같이 회고한다. ‘어딘글방’엔 글쓰기를 하고 싶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학교를 자퇴하고 제도권 밖의 배움을 모색하던 열아홉 살의 이길보라와 대안학교를 다니던 열여덟 살 이슬아, 이다울도 그중 하나였다. 어딘은 부모뻘의 나이였지만, 스승이기 이전에 함께 글쓰기의 글을 내는 동료였다. 그곳엔 나이나 학교, 어떤 위계도 없었다. 이슬아는 어딘글방의 ‘개근생’이었다. 7년 동안 매주 성실하게 글을 써냈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일간 연재를 배짱 좋게 시작한 것도 어딘글방에서 쌓은 ‘글쓰기 근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농인 부모님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동명의 책 <반짝이는 박수소리> 역시 어딘글방에서 싹을 틔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한 후 학교 밖 ‘로드스쿨러’로 스스로를 명명한 이길보라는 열아홉 살에 처음 어딘글방을 찾았다. 글방에서 쓴 글이 단초가 돼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로 만들어졌다. 이길보라는 “학교 밖에서 유일하게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위계 없이 n분의 1의 지분을 갖고 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글방에서 쓰던 글이 영화로 확장됐다. 서로의 작업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공동체였다”고 말했다.

인생의 한 시기를 같은 글방에서 보낸 세 명의 90년대생 작가들이 나란히 책을 냈다.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을 엮고 더한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문학동네), 네덜란드에서 영화를 배우며 경계를 확장해나간 이야기를 펴낸 이길보라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문학동네), 원인 모를 만성질환과 만성질환에 대해 무지한 사회 속에서 고통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이야기한 이다울의 <천장의 무늬>(웨일북)이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문학동네), 이길보라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문학동네), 이다울의 <천장의 무늬>(웨일북).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문학동네), 이길보라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문학동네), 이다울의 <천장의 무늬>(웨일북).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들의 스승 김현아(어딘) 작가와 함께하는 북토크가 열렸다. 스승 어딘이 사회를 맡아 제자이자 동료 작가인 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싱어송라이터 겸 작가 요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펴낸 김하나·황선우 작가, 어딘글방의 동료 등이 자리를 채웠다. 코로나19로 인해 소규모로 진행된 행사에서 청중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재능마저 뛰어넘는 반복의 힘…‘부지런한 사랑’



“‘일간 이슬아’를 받아보고 혁명의 기운을 느꼈어요. 모두가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슬아는 자기 직업을 스스로 만들어냈어요. 이슬아는 ‘검객’이라고 생각해요. 잘 들지 않는 칼 하나를 들고 무림에 나가 고수들과 싸우며 3년을 지나왔어요.”(어딘)

이슬아는 벌써 6번째 책을 펴냈다. 20대 여성의 삶과 우정, 사랑, 일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던 ‘일간 이슬아’는 인터뷰, 동료 작가들의 글, 서평 등으로 내용을 확장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슬아는 이제 스스로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글쓰기 교사가 되어 만난 아이들의 그들이 쓴 글을 엮은 책이 <부지런한 사랑>이다. 이슬아는 지난 6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장 의원은 후원회를 개설하며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에 나오는 글 ‘재능과 반복’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딘글방’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친 작가 김현아(어딘·왼쪽 첫번째)가 자신의 제자인 이슬아·이다울·이길보라의 북토크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이슬아 작가 제공

‘어딘글방’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친 작가 김현아(어딘·왼쪽 첫번째)가 자신의 제자인 이슬아·이다울·이길보라의 북토크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이슬아 작가 제공

장 의원은 “저는 타고난 정치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던한 반복’으로 정치의 세계를 일구며 매일매일의 변화를 꾸준히 만들어나가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얼마나 평범하거나 비범하든, 재능에 대해 누가 뭐라고 말하든 국회에서, 거리에서,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 사회 평등과 존엄의 가치를 계속 소리 높여 이야기해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슬아의 글쓰기는 이제 정치와 만나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슬아는 “역대 국회의원과 후원회장 조합 중에 가장 흙수저가 아닐까. 창작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백’이 없는 젊은 여성의 조합이 그동안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멀게만 느껴졌던 의회 정치를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진화하는 인간’…해보지 않으면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보라를 보면 ‘인간은 진화하는구나’ 생각하게 돼요. 제가 30대에 했던 일을 10대에 하고 제가 40대에 했던 일을 20대에 했어요. 벌써 세 번째 장편 다큐를 만들고 있고, 단독 저서도 세 권째 냈죠.”(어딘)

이길보라 감독이 현재 제작 중인 신작 <우리의 몸>의 한 장면. 이길보라 감독 홈페이지

이길보라 감독이 현재 제작 중인 신작 <우리의 몸>의 한 장면. 이길보라 감독 홈페이지

이길보라는 고등학교 1학년을 자퇴하고 아시아 8개국으로 여행을 떠나며 크라우드 펀딩으로 여행자금을 마련했다. 네덜란드 유학비 역시 펀딩을 통해 마련할 수 있었다. “나만 행복한 영화를 만들게 아니라 내가 만든 영화와 글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굳은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기억의 전쟁>을 만들고, 현재는 자신의 할머니, 어머니, 자신으로 3대째 이어진 낙태 이야기를 다룬 <우리의 몸(Our Bodies)>란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하고 있다. 2016년 일간지 칼럼을 통해 자신의 낙태 경험을 공개했으며, 최근 ‘처벌 조항’을 유지한 낙태죄 개정안에 대해서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길보라는 <우리의 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현재의 낙태죄가 헌법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에서 여전히 금기사항입니다. 여자의 ‘몸’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낙태를 해야 했습니까? 왜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왜 태어났고 누구는 태어나지 못했을까요? 최근 스웨덴 국제개발원이 1968년 한국에 경구피임약을 공급했고, 미국이 한국의 피임정책에 상당한 자금을 제공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여성의 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성의 몸은 숨겨지거나 말하지 않은 기억을 담고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최전선의 전쟁터입니다.”

이름 없는 통증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



이다울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 전신을 관통하는 만성통증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썼다. 만성통증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시간이 많았던 이다울은 누워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안경인 ‘레이지 글래시스’(lazy glaases)를 쓰고 글을 쓰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을 땐 녹음기를 켜서 녹음을 했다. 스티커를 만들어 자신의 통증을 1부터 5단계까지 표시하기도 했다.

그렇게 쓰인 글은 뜻밖에 단단하다. 어딘은 그의 글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단단한 글을 쓸 수 있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저릿한 고통이 느껴지지만, 고통에 잠식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법이 없다. 담담하고 단단하게 그와 더불어 사는 삶의 고통과 기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억울함에서 시작된 글쓰기”라고 말한다. “만성통증은 정확한 진단명이 없어 ‘엄살’로 치부되며 의료적 혜택으로부터 고립돼요. 지속적인 유급노동을 할 수 없어 경제적으로도 고립됩니다. 통증을 비롯한 손상을 어떻게 ‘열린 이야기’로 가져갈까 고민했어요. 글을 쓰면서 숨어있던 만성질환자들이 공감의 피드백을 줬고, 글을 쓸 힘을 얻게 됐어요.”

‘어딘글방’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친 작가 김현아(어딘·왼쪽 첫번째)가 자신의 제자인 이슬아·이다울·이길보라의 북토크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이슬아 작가 제공

‘어딘글방’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친 작가 김현아(어딘·왼쪽 첫번째)가 자신의 제자인 이슬아·이다울·이길보라의 북토크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이슬아 작가 제공

어딘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지워진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책 <그녀에게 전쟁> 등을 펴낸 작가다. 현재 청소년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대표 교사다. 여전히 글을 쓰고 가르친다. 메일링 서비스 ‘어딘의 연연’을 연재하고 있다. 연재에는 이슬아, 이길보라, 이다울에 대한 이야기도 실렸다. 어딘은 세 명의 작가들에 대해 “저의 동지이자 동등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언젠가 이 친구들이 나의 동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 가능하다”고 말했다.

북토크 말미, 이길보라가 말했다. “슬아는 책에서 ‘재능과 반복’을 강조했어요. 하지만 물리적으로 이런 노력이 불가능한 사람이 존재하죠. 제 책에서도 ‘괜찮아,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몸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죠. 자칫하면 북토크가 ‘재능과 반복, 할 수 있어’와 같은 분위기로 흘러갈 수 있었는데 다울이 함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딘글방에서 시작된 이들의 글쓰기는 서로의 고유한 색깔을 지닌 채 확장되고 뻗어나가면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이영경의 Stage]이슬아·이길보라·이다울, 단단한 여성들의 경계 없는 부지런한 글쓰기[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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