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은 세대를 아우르는 낱말이다. 단풍이 물든 가을이면 곳곳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백일장(白日場)’이라는 말에는 대낮에 글을 짓는다는 뜻이 있다. <태종실록>에는 1414년 7월17일에 태종이 명륜당에서 유생들에게 문장을 겨루게 했던 것이 백일장의 시초라고 적혀 있다. 유시(酉時)의 첫째 시각인 오후 다섯시 이전에 글쓰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요즘도 ‘장원’ ‘차상’ 같은 옛 이름은 남아있고 대부분은 아직 원고지에 글을 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어린이도 백일장을 경험한다. 초등학교 때 거여동의 군부대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한 기억이 난다. 이른 아침부터 버스를 갈아타고 인솔하는 선생님을 따라 현장에 도착했더니 어린이들이 모여 있었다. 접수번호에 따라 줄을 서는데 옆자리 아이가 “그래서 너는 글을 좀 쓰냐?”고 물었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낯가림도 있었고 작가처럼 근사한 대화를 나누자는 건가 하며 우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시제는 ‘멋진 군인 아저씨’였다. 낙하산 축하쇼를 본 뒤 푸른 하늘과 텅 빈 원고지를 번갈아 보면서 무엇을 써야 할까, 쓰는 일은 무엇일까 아득함을 느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때다.
2000년대 초 IMF 외환위기 직후에 한 방송사가 주관한 전국어린이백일장의 심사에 참여했다. 시제는 ‘희망’이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참가했지만 글의 흐름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어서 외환위기를 극복했으면 좋겠다는 현실적 희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래희망 이야기였다. 최종심에서 심사위원들은 어느 1학년 어린이가 쓴 ‘손이 자라는 희망’이라는 글을 장원으로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뭉툭한 연필심을 눌러 쓴 이 글은 거제도에서도 한참 떨어진 섬에서 온 것이었다. 늦둥이였던 글쓴이는 양식 일을 하는 나이 많은 부모님과 셋이서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물을 수선할 때마다 노안이 와서 큰 구멍들을 놓치고 만다. 곁에서 보던 글쓴이가 돕겠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손이 자라고 나면 하라”고 한사코 물리친다. 글쓴이는 자신의 조그만 손을 보면서 얼른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다.
비대면 시대의 백일장은 어떻게 열릴까. 우편으로 열리고 온라인으로 열린다. 35회를 맞은 새얼 백일장에 어린이들의 글을 읽으러 갔는데 한자리에 모이지 않고 백일장이 열린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글쓰기는 시대를 반영하고 위기를 디디면서 계속 이어진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으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3·4학년의 시제는 ‘혼자’ ‘마스크’ ‘소곤소곤’이었다. 감염병 시대 어린이들의 외로운 분투가 생생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동안 혼자 물구나무를 익힌다. 마스크처럼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지만, 없으면 걱정스러운 갑갑한 동생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는 ‘성평등, 쓰고 그리다’라는 백일장 성격의 공모전을 열었다. 2020년은 아동청소년들이 불법 성착취 동영상의 핵심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법정에 오른 해다. 이를 날카롭게 지켜본 어린이와 청소년의 목소리가 전국에서 투고되었다. 이 마음들이 단단한 글이 되어주어서 다행이다.
글을 쓰는 일은 눈을 감는 일과 비슷하다. 우리는 주사를 맞거나 울 때 눈을 감는다. 아픔이나 슬픔을 눈 뜨고 보려면 용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어떤 아픔과 슬픔은 눈을 감았을 때 더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가 더욱 펑펑 울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눈 감는 마음으로 아픔을 품고 글을 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글을 읽은 덕분에 뚜렷하게 현실의 고통을 보게 되고 문제에 눈을 뜬다. 비대면 시대에는 글과 책이 친구이자 용기이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가을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