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의 선택이 조 바이든으로 굳어지고 있다. 차악을 선택한 결과라 해도 미국 대선은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명백한 심판이다. 트럼프는 우파 포퓰리즘을 부활시키며 ‘21세기 히틀러’로 불렸다. 지금도 대선 결과 불복 선언을 서슴지 않고, 코로나19로 베트남전쟁 사망자보다 많은 수의 자국민이 죽어도 중국 탓만 하고 있다. 물론 바이든이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다 해서 세계 질서가 순식간에 합리적으로 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덜 나쁜 권력을 고르는 게 정치의 속성이라면 세상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만은 막은 정도는 되겠다.

구혜영 정치부장
바이든은 위기 때마다 “한 인간의 묘비에 적힐 평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기 전 빠뜨리면 안 될 서사를 추가하고 싶다. 미국의 46대 대통령은 흑인 여성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고, 그가 30년 전 여성폭력방지법을 만들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인종·계급 문제가 최우선 모순인 미국에서 흑인 여성은 가장 어려운 위치에 있다. 2등 시민이다. 그런 미국이 첫 흑인 여성 부통령을 맞게 됐다. 카멀라 해리스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지난 10월7일 부통령 토론회였다. 해리스는 마이크 펜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말을 끊을 때마다 “Mr. Vice President, I’m Speaking(내가 말하고 있잖아요)”이라고 세 번이나 반박했다. 내가 말할 차례고, 이는 나의 권리라는 저항이었다. 여성들은 “그동안 아무도 이 말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며 응원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 이 한마디는 ‘2등 시민은 주권자가 아니’라는 기득권에 대한 반격이자,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여성이 리더가 되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바이든이 1993년 여성폭력방지법 통과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 상원 법사위원장이었던 바이든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웠던 법안”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바이든은 법사위 단상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여성폭력방지법엔 반드시 민권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 성별 기반 폭행에서 여성의 권리가 민권이란 걸 인정해야 국민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 바이든은 홀로 싸웠다. 법안을 처음 발의했던 1990년에도, 재발의한 1991년에도 표결조차 못했다. 바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 당선 1년 후인 1993년 11월, 여성폭력방지법은 마침내 미 상원을 통과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국 대선의 중요한 의미는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정치 목표로 삼을 줄 아는 남성 후보가 등장했고, 그 후보가 여성인권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 여성을 부통령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바이든의 미국이 여성을 진정한 주권자로 호명한 이때, 세계사와 우리 현대사의 불협화음을 곱씹는다. 진보의 물결(68혁명)에 반공(유신독재)으로 맞섰던 1970년대. 보수의 회오리(신자유주의)가 몰아칠 때 민주화(6월항쟁) 불씨를 지폈던 80년대. 점잖게 혁명과 반동 이야기를 꺼냈지만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여성을 존엄의 위기로 몰고 있는 민주당 때문이다. 민주당은 2015년 ‘중대한 잘못’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한 당헌을 뒤집고 내년 재·보궐 선거의 공천을 결정했다. 전 당원 투표 86% 찬성이 명분이었다. 이낙연 대표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유능한 후보를 내겠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궤변인가. 권력형 성범죄는 국정 과제가 아니어야 하나. 또, 성범죄 정도는 중대한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쉽게 당헌을 만들고, 폐기한 것 아닌가. 당원을 면죄부로 삼고, 당선되면 시민을 면죄부로 삼겠다는 반정치를 서슴지 않으면서 말이다. 전 당원 투표라는 꼼수를 생각할 시간에 ‘양성평등’이란 단어가 박힌 여성폭력기본법을 개정했다면, 낙태죄를 폐지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힘을 쏟았다면. 그러나 이번에도 다음이다. 젠더 의제는 늘 뒷전인 민주당을 호되게 꾸짖으라고 엘리 위젤(홀로코스트 생존자)이 이런 말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어제 침묵한 자는 오늘도 침묵했고 내일도 침묵한다.”
“여성 폭행을 심각한 범죄로 인식한다면 여성들은 더 이상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30년 전 바이든의 외침과,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라고 한 2020년 해리스의 경고가 미국 정치 역사에 깊이 새겨지길 바란다. 나아가 미국 국경을 넘어 진보의 시대를 여는 머리말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도 부러운 마음부터 앞서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