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지킬앤하이드>, <안나 카레니나>, <프랑켄슈타인> 등 대작들의 주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배우 민우혁이 2월 폐막한 <영웅본색> 이후로 긴 휴식기를 가졌다. 그간 KBS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슈퍼맨이 돌아왔다>, MBC 프로그램 <복면가왕>, 채널A <DIMF 뮤지컬스타>에 출연하면서 브라운관을 통해 소식을 알리기도 했지만 ‘소’처럼 일하던 그의 공백기는 뮤지컬 팬들에게 꽤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10월, 민우혁이 뮤지컬 <광주>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창작 뮤지컬이다. 1980년대 광주 시민들이 군부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을 그린다. 민우혁은 편의대원으로 광주에 파견됐지만, 이념의 갈등을 겪고 광주시민의 편으로 돌아서는 ‘박한수’ 역을 맡았다. (편의대는 일반 시민으로 위장해 정보수집과 선동의 임무를 수행한 특별부대이다.) 박한수는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선동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마주하고 고뇌에 빠진다.
오랜만에 한국인 역을 맡아 감회가 남다르다는 배우 민우혁. 그에게 뮤지컬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분노와 슬픔이 치밀었다는 배우 민우혁을 만났다.

배우 민우혁ㅣ올댓아트 강나윤
바빴던 2019년과는 달리 2020년에는 꽤 긴 휴식기를 가졌어요.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나요?
아니요, 사실 쉬는 게 무서웠어요. 다시 무대에 서지 못할까 봐 두려웠어요. 제가 그동안 성대도 많이 쓰고 감정 표현도 풍부한 극한의 공연들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성대와 몸 모두 건강한 상태로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쉬는 기간 동안에 재채기 몇 번만으로도 목이 쉬더라고요. 결국 성대도 근육이고 사용하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어요. 그 순간 이 모든 게 너무 큰 공포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밤마다 혼자 차에 타서 그동안 제가 참여한 공연의 넘버들을 계속 불렀어요. 저만의 연습실에서 끊임없이 노래와 발성연습을 한 거죠. 쉬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더라고요. 무대에 대한 그리움만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렇다면 돌아온 작품 <광주>에 대한 애착이 클 것 같아요. 얼마 전 첫 공연을 올렸는데 어땠나요?
너무 벅찼어요. 사실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가면 해당 장면에 100퍼센트 몰입해야 해요. 그런데 무대 위에 올라 객석을 보는 그 순간 울컥해서 노래를 이어 부르지 못했어요. 그냥 모든 게 다 감사하더라고요. 또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에서의 기분도 남달랐어요. <광주>가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 만큼 관객분들의 박수 소리부터 달랐어요. 소리가 굉장히 무거웠어요. 그래서인지 보통 공연을 마치면 해냈다는 후련함이 들기 마련인데 <광주>는 계속해서 먹먹했어요.

뮤지컬 <광주> 캐릭터 포스터ㅣ라이브
<광주>에서 맡은 ‘박한수’ 역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박한수는 편의대원으로 작전에 투입됐다가 생각지도 못한 여린 광주 시민들을 마주하면서 변화를 겪어요. ‘왜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저항할까’라는 고민을 거듭해요. 그리고 결국 자신의 임무에 대한 회의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광주 시민들의 편에 서죠. 극 중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이에요. 단, 주인공은 아니에요. 극의 중심에 있다고 할지라도 뮤지컬 <광주>의 주인공은 광주시민들이니까요.
편의대원에서 광주 시민들의 편으로 돌아서는 ‘박한수’를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박한수라는 캐릭터를 살리기가 참 어려웠어요. 그가 광주시민들을 선동해 건강한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변질시키고자 했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념의 변화를 겪고 끝내 임무를 완수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죠. 그래도 저는 그가 결코 용서받으면 안 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광주시민들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극 중 박한수는 광주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선동에 앞장섰어요. 그렇기에 제가 만약 한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면 관객들에게 ‘박한수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한수는 불쌍해 보이면 안 되는 캐릭터이기에 그의 피해 의식을 최대한 배제했죠.
또 우리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들간의 서사도 다채롭고요. 무엇보다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소재를 다루는 극이기에 러닝타임 이내에 이 모든 서사와 개연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과정이 어려웠어요. 특히 박한수는 극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에 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습하는 과정에 연출님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캐릭터의 감정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잘 표현이 되지 않으면 무조건 고선웅 연출님께 여쭤봤어요. <광주>만큼 연출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던 작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배우 민우혁ㅣ올댓아트 강나윤
그동안은 거친 감정들을 쏟아내는 역할들을 많이 맡아왔어요. 이번 ‘박한수’는 이전의 역할들과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네, 비유하자면 저는 주로 시민군을 조작하고 지휘하는 ‘윤이건’과 비슷한 역할을 많이 맡아왔죠. 감정을 폭발시키는 그런 역들이요. 사실 제가 원래도 표현력이 강해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철저하게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주로 표현해 왔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박한수 캐릭터는 상당히 새로워요. 박한수에게서 연민을 빼기 위해 제가 느끼는 감정들을 최대한 절제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당장 어제도 공연 중에 참담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데도 그걸 참아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제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것 같아요. 주로 연기해온 스타일이 아닌 색다른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끔 만든 작품이죠.
<광주>의 넘버들이 신선하지만 배우들에게는 어렵겠다는 평들이 있어요.
맞아요, 어려워요. (웃음) 사실 연습 들어가기 전에 미리 한 곡을 받아봤어요. 너무 궁금했거든요. 근데 곡을 보자마자 작곡가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어요. 이건 진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연습 들어가기 10일 전에 제가 따로 음악 연습 요청을 드릴 정도였어요. 연습 때도 애를 많이 먹었어요. 음악에 엇박자도 많고 음정을 잡기 힘든 부분도 있거든요. 요즘도 조금의 긴장이라도 늦추면 실수하기 매우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이번 작품을 연습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작품 이후에 이 세상에 내가 못할 뮤지컬은 없겠다! (웃음)
<광주>의 여러 넘버 중 가장 가슴을 울리는 곡이 있을까요?
당연히 ‘님을 위한 행진곡’이죠. 사실 저는 이 곡이 민주화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도 이 곡은 연습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 뜨거워져요. 저번에 모든 배우들이 다 같이 이 곡을 연습하는데 저희 다 울고 있더라고요. 이후에 저희끼리 이런 말도 나눴어요. 이 감정으로 그 당시에 광주에 있었다면 당연히 목숨 걸고 시민군으로서 맞서 싸웠을 것 같다고요. 그만큼 부를 때마다 가슴속 깊이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곡이에요.

배우 민우혁ㅣ쇼온컴퍼니
타국의 역사를 다루는 작품은 많이 했어도, 한국 시대극은 아마 처음이죠?
네, 저 정말 오랜만에 한국인 역을 맡았어요. (웃음) 사실 예전에는 작품들을 하면서 막연하게 우리나라 역사극을 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나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루는 작품을 맡게 됐네요. 아마 그래서 이 작품이 저에게 주는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아요.
뮤지컬 <광주>의 시대상을 이해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을 것 같아요.
저는 이번에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점들이 너무 많아요. 사실 편의대원이라는 존재도 처음 알았거든요. 그만큼 저조차도 무지했던 거죠. 많은 공부를 했지만 가장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은 전남도청을 방문했을 때예요. <광주> 트레일러 촬영을 위해 갔지만 그곳에서 제가 알지 못했던 그간의 이야기들을 실제로 마주했어요. 슬픔을 넘어서서 분노가 치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작품이 저처럼 무지했던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매개체가 되면 좋겠어요.

배우 민우혁ㅣ올댓아트 강나윤
뮤지컬 <광주>는 캐스팅 때문에 더 큰 기대를 받았어요. 그만큼 좋은 배우들이 많이 참여하는 극인데요. 연습은 어땠나요?
배우들과의 작업이 진짜 즐거웠어요. 연습실에서 작품 얘기밖에 안했다니까요. 저번엔 제 연습이 오후 1시부터 오후 2시까지였는데,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11시까지 남아있었을 정도였어요. 그만큼 배우들이랑 합을 맞춰보는 과정이 너무 좋았어요. 특히 등장하는 배우들이 많아서 배우들간의 관계가 다양해요. 그래서 배우가 바뀌면 극이 달라져요. 예를 들어 제가 김찬호 배우랑 연기할 때와 민영기 배우와 연기할 때의 느낌이 상당히 달라요. 정해진 대본 안에서 각자 대사를 하는 뉘앙스가 다 다르거든요. 이게 어렵기도 한데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이기도 해요.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배우 민우혁이 갖는 강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힘이요. (웃음) 힘, 에너지. 이런 건 진짜 자신 있어요. 저는 공연을 할 때 내일은 없다는 느낌으로 연기해요. 사실 내일 공연을 위해서 체력을 알맞게 분배해야 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렇게 공연하면 밤에 잠이 안 와요. 박수를 받을 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어요. 그냥 저 스스로 용납이 안돼요. 그래서 제 배우 인생의 모토가 그거예요. 쓸 수 있을 때 다 써버리자. 아껴서 뭐 하냐.
넘치는 힘 때문에 생긴 실수 에피소드는 없나요?
공연 중에는 아직 없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편의대원이 들고 다니는 쇠 파이프를 제가 부러트렸죠. 물론 실제로는 나무 막대기예요. 앙상블 배우 중 한 명이 ‘형은 그거 진짜 부러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몽둥이가 부러져 있더라고요. (웃음) 저 진짜 힘은 자신 있어요.

배우 민우혁ㅣ올댓아트 강나윤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뮤지컬 <광주>의 관전 포인트를 알려주세요.
뮤지컬 <광주>는 배우들 개개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요. 무대 위 어느 곳으로 시선을 둬도, 그들의 드라마가 계속 펼쳐지고 있어요. 주연들의 원맨쇼가 아닌 작품을 위해 모인 배우들의 합작품이죠.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면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에너지가 엄청날 거예요. 또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던 역사를 올바르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해요. 당시 시민군들이 어떤 마음으로 투쟁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가시면 매우 뿌듯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작품은 소재가 소재인 만큼 상당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고 준비했어요. 창작 초연이기에 준비하는 과정에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제게는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광주>가 계속 발전해 나가서 결국 한국판 <레미제라블>이라는 평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뮤지컬 <광주>
2020.10.09 ~ 2020.11.08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공연 시간 160분
중학생 이상 관람가
민우혁, 테이, 서은광, 민영기, 김찬호, 장은아, 정인지, 정유지, 이봄소리, 최지혜, 이정열, 박시원, 서현철, 이동준, 김대곤, 주민진, 김아영, 김국희, 김태문, 문성일, 이봉준 등 출연
사진 | 올댓아트 강나윤, 라이브, 쇼온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