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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끝에 격렬비열도가 있다

주꾸미를 끌어올리면 고려청자가 딸려 나오는 태안 앞바다, 그곳에서 뱃길로 백리 남짓에 격렬비열도가 있다. 서쪽바다 끝 섬이다. 가거도보다 중국에 더 가깝다. 아득한 옛날에는 중국 산둥반도의 닭 울음소리가 이곳까지 건너왔다고 한다. 격렬하거나 비열한 섬이 아니다. 북, 동, 서쪽의 3개 섬과 이에 딸린 9개의 작은 섬들이 늘어서있는 열도(列島)이다. 그래서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는 이름처럼 ‘새들이 줄지어 날아갈 듯 떠있는 섬’이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선박 접안시설이 없어서 바다에 일체의 노기(怒氣)가 없어야만 섬에 갈 수 있다. 다행히 바다가 바람을 재워서 섬을 연모하는 사람들과 함께 북격렬비열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곳에는 등대가 있다. 가을은 물에 젖지 않고 건너와 11월의 무인도는 군데군데 초록이 지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청갓과 유채가 지천으로 깔려 있고 우거진 동백, 사철, 산뽕나무가 아직 씩씩했다. “다양한 난대식물, 수백 그루의 동백나무, 무리지어 사는 괭이갈매기, 박새, 매, 가마우지 외에도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Ⅱ급인 ‘장수삿갓조개’를 비롯해 희귀종과 한국 미기록종이 다수 서식하고 있다.”(김정섭 <격렬비열도>)

격렬비열도는 바닷속도 비옥하다. 조기, 우럭, 전복 등 고급 어족이 잡히는 황금어장이다. 예부터 중국 어선이 몰려들었다. 지금은 떼 지어 노골적으로 영해를 침범하고 있다. 긴장의 파고가 어느 때보다 높다. 죽창, 쇠창살, 해머 등으로 무장한 저들을 단속하는 것은 해전(海戰)과 다름없다. 또 격렬비열도 인근 해역에서는 밀입국과 밀항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도 격렬비열도를 거쳐 중국으로 달아났다. 경비망을 뚫고 공해상에서 대기하던 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현지 주민들은 이 같은 해상 불법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격렬비열도에 함정이 정박할 만한 전진기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격렬비열도는 안보, 경제, 환경, 생태에 더없이 중요한 섬이다. 그럼에도 섬 세 개 중 서쪽과 동쪽 섬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중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쪽 섬에 눈독을 들였다. 2012년 중국인이 조선족을 앞세워 소유주에게 접근했다. 다행히 섬 주인은 ‘거액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때서야 정부가 나서 외국인토지거래 허가지역으로 지정했다. 그럼에도 정작 섬은 사들이지 않았다. 백성의 애국심은 바위처럼 묵직했지만 나라의 대응은 공깃돌처럼 가벼웠다. 서격렬비도 전체의 공시지가는 2020년 기준으로 1억1099만원이고, 동격렬비도는 2억3909만원이다(김정섭의 계산). 세 배로 높여서 매입해도 겨우 10억원이다. 서울 도심의 아파트 한 채만 팔면 섬 두 개를 사고도 남는다.

상상 속의 격렬비열도는 여전히 격렬하고 비열하다. 격렬하게 좋아했다가 비열하게 돌아선 사랑, 그 사랑은 갈 곳 없이 떠돌다 간신히 섬에 닿는다. 아픈 사랑의 최후의 망명지. 그래서 시인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박정대)”고 있다며 가슴을 친다. 아마도 섬은 상처 난 사랑을 품어 바닷물에 씻긴 후 괭이갈매기 편에 어딘가로 실어 보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사랑은 누군가의 첫사랑이 될 것이다. 비록 언젠가는 아플지라도 두근거리는 마음이 되고 설레는 가슴이 될 것이다. 뱃길이 열리면 또 다른 연인들이 찾아와 저마다 다른 색깔의 사랑을 빠뜨릴 것이다.

최근 정부는 격렬비열도를 국가관리 연안항으로 예비 지정했다. 다행이다. 그리 되면 독도처럼 선박 접안시설이 생길 것이다. 등대는 차디찬 바다만 비추지 않을 것이다. 뱃사람들 마음까지 밝혀줄 것이다. 찬 바다에서 막 돌아온 병사들이 뜨거운 커피로 간밤의 긴장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배들이 섬 그늘에서 쉴 수 있고, 누구나 섬에 들어 지난 세월을 풀어보고 그리운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 되려면 모든 것을 소리 없이, 은밀하게,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

숨 가쁜 일들이 밀려드는데 섬 이름이 좀 길다. 바쁠 때는 ‘격비도(格飛島)’로 부르면 어떨까. 뱃길이 활짝 열리면 격렬비열도는 보란 듯이 줄지어 비상(飛翔)할 것이다. 있을 것은 다 있는데 우리 관심만 빠져있었다.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해의 독도’로 불림은 굴욕이며 수치이다. 이제 제 이름을 불러주자. 남쪽의 마라도보다 다섯 배, 독도보다는 열 배나 외로운 섬. 서해 끝에 격렬비열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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