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K대 나왔다며? ○○ 동문이네!” 한 언론사에 인턴으로 입사한 날, 최지은씨는 회사 선배가 인턴 동기에게 툭 던진 한 마디에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K대 같은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아니었던 최씨는 이후 학교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다물었습니다.
인턴을 마친 최씨는 현재 구직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 문을 두드려보지만 힘이 듭니다. 언론사 취업준비생들의 온라인 카페에 매일 올라오는 학벌 고민 글을 읽으며 최씨는 답답합니다. 최씨는 “저는 제 모습 그대로 평가받기를 원합니다. 이력서 위 몇 줄이 아니라 제 잠재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출신 학교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시도가 있습니다. 고용과 교육 등 분야에서 출신 학교에 대한 차별을 막자는 취지의 ‘출신학교차별금지법’입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된 뒤, 21대 국회 임기인 올해 다시 논의되고 있습니다. 24일 국회에서는 박완주·안호영·오영훈·강득구·서동용·윤영덕 의원과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 주최로 ‘출신학교 차별금지법’에 대한 비대면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능력과 상관없는 ‘학교 간판’으로 차별…법으로 규제해야”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측은 학력 차별이 사회 전반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합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홍민정 사걱세 공동대표는 “매년 많은 학생들이 입시경쟁과 사교육 고통으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있다”며 “그 유발요인을 분석해보니 핵심은 ‘채용 시 출신학교 차별관행’이었다”고 했습니다. 채용시장의 출신학교 차별 때문에 어릴 때부터 더 좋은 학교를 가려 하고, 그 결과 학생들이 과열된 입시 열풍에 시달린다는 주장입니다.
홍 대표는 일상 속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학력 차별 사례들을 소개했습니다. 고려대와 연세대 의료원은 지원자의 출신 학교를 단계별로 나눠 점수를 다르게 줬습니다. 하나은행이 최종 면접 점수까지 나온 상태에서 명문대 출신 탈락예정자들에게 추가점수를 줘 합격시킨 사례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한 대학 로스쿨이 지원자의 출신 학교를 5개 등급으로 나눠 ‘성실성’ 점수로 만든 것을 두고는 “대학 간판이 이들의 성실성을 나눌 수 있는 지표인가”라며 비판했습니다.
출신학교 차별 금지에 대한 국민 공감대도 높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15 교육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68.6%는 사교육의 원인이 ‘학벌 중심 사회’라고 응답했습니다. 2017년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81.5%가 출신학교차별금지법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죠. 홍 대표는 “헌법과 법률의 정신을 바탕으로 ‘어떻게’ 차별하면 안 되고, 차별할 경우 어떤 제재를 받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홍 대표는 “공공기관은 블라인드 채용이 의무화됐지만 전체 일자리의 9%에 불과하다”며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홍 대표는 이어 “인사담당자들과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출신학교는 직무능력과 관련이 없다”며 “대신 (블라인드 채용으로) 직무적합성이 높은 지원자를 선발하면 신입 직원은 예상 직무와의 괴리감이 줄고, 업무만족도가 높아져 조기퇴사율과 이직률이 감소해 조직 역량이 강화된다”고 말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이 오히려 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넘어야 할 현실들…민간영역 정부 개입은 숙제
토론에 참여한 패널들은 출신학교차별금지법의 취지와 목적에 대체로 공감했습니다. 박한우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은 “인권위에 들어온 차별 경험 사유를 보면 ‘성별’과 ‘나이’ 다음으로 ‘학력·학벌’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네 자녀를 둔 학부모 최영이씨는 “많은 아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탐색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학창시절을 보낸다”며 “학원비를 벌기 위해 일을 늘려야 하는 부모의 삶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백정하 대학교육협의회 고등교육연구소장은 “무분별한 스펙쌓기를 방지하고 직무역량을 기른다는 관점에서 (법안이) 의미있다고 본다”면서도 “공공기관이나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아닌 이상,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려면 시간과 경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영중 고용노동부 노동시장정책관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천 명의 지원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비용을 최소화하고 싶어한다”며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학력차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홍 대표는 이에 대해 “사걱세는 직원 30명 규모의 사업체지만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데 무리가 없다”며 “정부가 내놓은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직무기술서가 이미 사걱세를 포함한 이곳저곳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정부 당국도 ‘입법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김영중 정책관은 “고용노동부도 불합리한 출신학교 차별을 막기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 중이지만, 민간 영역에 강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문희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출신학교와 학력을 동일선상에 볼지도 고민해야 한다. (출신학교 정보가 필요한) 농어촌 전형이나 지방인재 육성 법률 등과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인식 개선 없이는…” vs “김영란법처럼 인식 개선 이끌어야”
‘입법’과 ‘사회 인식 개선’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두고도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김영중 정책관은 “출신학교라는 것이 출신 지역이나 부모 재산 등과 달리 ‘본인의 성취’라는 시각도 있다”며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취지에 공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인식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김문희 정책기획관도 “구직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본인의 역량과 잠재능력을 보이기 위한 추가 노력이 필요한 셈”이라며 “사회 전반의 인식개선이 없다면 한쪽에서만 해결될 것 같다. 법 문제와 사회운동이 같이 가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취업준비생 최지은씨는 “인식 변화가 단시간에 이뤄지는 건 아니다. 제도가 먼저 마련된다면 의식 변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홍 대표도 “인식 변화가 이상적이겠지만 때로는 법이 의식을 선도할 수도 있다.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이 그 예시”라며 “출신학교차별금지법이 김영란법처럼 국민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