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망’으로 보는 인식에
환자 상처, 가족도 고통
“명칭 바꿔달라” 청원글
복지부도 “전향적 검토”
김모씨(39)는 경증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에게 치매전문요양원 입원을 권유했다가 노여움만 샀다. 아버지는 “벽에 똥칠이나 하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는 것이냐”라며 김씨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뒤로 모든 가족이 아버지 앞에서는 치매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있다. 김씨는 “전문적인 치료로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 말한 것인데, 노망으로 보는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아버지가 상처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가족도 피하며 계속 혼자 있고 싶어한다”며 “치매라는 병에 모멸감을 느껴 환자가 숨지 않도록 대신할 단어가 생기거나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씨 아버지와 같은 환자가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치매라는 질환의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치매는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뜻이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치매라는 반인권적인 이름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치매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원인은 “치매라는 단어는 어리석다는 뜻의 한자 ‘치’와 ‘매’가 합쳐진 것”이라며 “기억을 잘 못하는 친구에게 ‘너 치매 걸렸냐’라는 말을 쓰듯, 치매라는 말이 비속어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인은 “병명은 질병의 본질을 드러내고 편견과 차별을 불러오지 않아야 한다”며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에게 편견과 차별로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반인권적인 치매라는 용어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질환명을 변경한 사례가 있다. 간질은 뇌전증, 문둥병은 한센병, 정신분열증은 조현병으로 각각 바뀌었다. 세계보건기구(WHO) 내에서도 나라마다 다르게 불리는 치매 관련 병명을 ‘인지기능저하(cognitive disorder)’로 부르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가 2014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문가 50%는 치매라는 병명을 바꾸는 데 찬성했다. 반면 일반 시민들은 병명을 바꿔야 한다는 응답이 23%에 그쳤다. 일반 시민 77%는 병명을 바꿔도 치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복지부는 최근 들어 치매 병명 변경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보고 이를 ‘인지증’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 중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내년 초 병명 개정에 대한 국민 인식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치매학회 등과 논의해 ‘치매관리법’이란 법 이름부터 바꿔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전 중앙치매센터장)는 “병명을 바꾸는 것이 효과를 내려면 전체 사회가 치매를 잘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등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없앨 수 있는 실질적 조치들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