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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13일.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의 절규는 2020년에도 진행형입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편법 고용 등 개선되지 않은 노동 현장에서 법의 보호망 밖에 서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는 한국 노동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대면 노동 비율이 높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감염 위험에도 더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초단기 노동과 특수고용직 여성 노동자들은 재난과 같은 감염 사태에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맞은 2020년, 이 같은 불공평한 현실을 바꾸고 노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전史(사)’. 여성 전태일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가요? 앞에 ‘특고(특수한 고용)’라는 단어 하나 붙이고 우리를 차별하는 게 화가 나고 억울해요. 특수고용직이 뭔지 모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일을 하면 ‘노동자’였으면 좋겠어요.”

가정과 사무실에 놓인 정수기 등을 관리하는 김순옥씨(49)는 ‘코디(코웨이 레이디)’라고 불리는 서비스 점검 노동자이다. 지난 9월 경기도의 한 상가. 얼음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고 있던 그는 머리를 짧게 치고, 입술엔 살짝 붉은빛이 도는 립스틱을 발랐다. 검정 신발에 하늘색 근무복을 입고 있었다. 회사의 복장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다양한 제품을 점검하고 고객에게 설명하는 일이다보니 교육도 잦다. 지점에서는 수시로 업무를 지시한다. “코웨이의 얼굴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해요.”

하지만 그는 정규직이 아닌, 특수고용직 노동자이다. 회사에서 급여가 아닌, 수수료를 받는다.

지난 9월 코웨이 서비스 점검 노동자 김순옥씨가 경기도의 한 상가에서 얼음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고 있다. 유명종 PD

지난 9월 코웨이 서비스 점검 노동자 김순옥씨가 경기도의 한 상가에서 얼음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고 있다. 유명종 PD

순옥씨가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고 내부를 청소하는 데 총 40분이 걸렸다. 자신의 자동차로 이동한 시간까지 더하면 1시간이 소요됐지만 이 일을 하고 그가 번 돈은 얼음 정수기 점검수수료 8700원이 전부였다. 시간당 최저임금 8590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노조 수석부지부장으로 활동하는 김순옥씨는 노조 업무를 겸업하기 전까지는 한 달에 점검하는 정수기가 250대였고, 점검 수수료로 140만~150만원을 벌었다. 그는 “하지만 통신비, 유류비, 자동차보험료, 렌털료 등을 제하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건 50만~60만원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영업’도 함께 뛴다. 강제사항은 아니지만 점검 수수료만으로는 월수입이 너무 적다. 영업이 안될 때는 코디로 일하면서 받는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평일에 밤 11시나 12시까지 식당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도 피자 가게에서 알바도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김순옥씨가 속한 지점에는 ‘영업 목표량’도 정해져 있다. 팀장과 지국장들은 기본급이 있지만 액수가 많지 않으며 월 영업 목표량을 맞춰야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영업과 상관없는 점검원들도 영업의 압박을 받는다. “지점에서 영업을 못하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 지국장 생일에는 ‘100데이’라고 해서 소속 코디들이 100개를 팔아오기도 했어요.” 영업 실적 때문에 개인적으로 렌털한 제품도 집에 열서너 개가 있다. “(영업을) 20개 하면 ‘명품코디’라는 상을 받아요. 19개를 하면 ‘어떻게 하나가 부족해서 못 받냐’고 자존심을 자극하지요. 그러면 무리해서 하나 계정을 맞추려고 (본인) 집에 하나씩, 하나씩 들여놓게 됩니다.”

코디들은 자기 돈을 쓰면서 영업을 하고 영업수수료를 벌지만, 고객이 중도에 계약을 취소할 경우 받은 수수료를 회사에 되돌려줘야 한다. ‘수당 되물림’이다.

“고객이 렌털료를 밀리거나 일정 기간 내 렌털을 반환하면 영업으로 받았던 수수료를 다시 회사에서 차감해 가요. 회사가 고객에게 받아야 하는 돈을 못 받았다고 (코디들에게) 줬던 수당을 다시 빼간다는 게 말이 되나요? 영업 이후의 문제는 회사와 고객의 일이잖아요. 지난해까지는 이 수수료가 150%였어요. 영업 수당을 10만원 받았다면, 15만원을 다시 떼 가는 거예요. 조금 개선해 준 것이 100% 차감입니다. 그럼 저희는 고객에게 드렸던 (가입)선물과 렌털료(할인) 등은 다 손해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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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동조합 코웨이지부 수석부지부장인 김순옥씨는 앞으로 50년 후에는 “특수고용직이 뭔지 모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명종 PD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동조합 코웨이지부 수석부지부장인 김순옥씨는 앞으로 50년 후에는 “특수고용직이 뭔지 모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명종 PD

코디들은 성폭력에 종종 노출된다고 한다. “원룸에 가서 점검을 하는데 남성 고객이 야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옆에 서서 절 계속 지켜보는데 너무 무서웠죠. 제 동료는 점검하러 갔다가 고객이 갑자기 바지를 내리는 바람에 기겁해서 뛰쳐나왔다고 해요.”

폭언도 예사로 듣는다. “얼마 전 아이가 있는 집을 방문했는데 고객님이 코로나19가 걱정된다면서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벽에 손이라도 짚을까 계속 쳐다보시는데 너무 긴장해서 정수기 호스를 놓치고 말았죠. 물이 튀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닦아내다가 크게 혼이 났어요.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만지냐’고. 우리 일이 이런 거구나. 너무 서러웠죠.” 그는 “성희롱이나 폭언과 관련해 회사 차원의 대책은 없다”고 했다.

코웨이는 지난해 창사 후 처음으로 매출 3조원을 기록했다. 노동자 처우는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코디들은 노조를 조직하고 지난 5월 노동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았다. 김씨는 “사측은 우리가 노동자가 아니라며 여전히 교섭에 응하지 않는다. 노조를 결성하기 전에는 코디들을 ‘식구’라고 불렀는데, 노조를 만든다고 하자 ‘파트너’라고 바꿔 불렀다”고 말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부당함을 느꼈고 ‘노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필요성은 모두 느끼는데 나설 사람이 없어서 (노조 수석부지부장을)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사실 ‘하겠다’고 해놓고서도 고민도, 생각도 너무 많았죠. 그러면서도 제가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더라고요. 마음으로는 ‘못하겠다’면서도 계속 무엇인가 하고 있는 거예요.”

김순옥씨가 노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회사에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한 것이다.

“저는 이 일을 부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전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하루를 온통 투자하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이렇게 회사 일을 하는데, 우리가 왜 회사 직원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태워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던 50년 전과 현장은 바뀌었다. 국가에서 정해 놓은 근로기준법에 맞춰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법의 보호를 받는다. “왜 특수한 고용형태의 근로자만 근로자가 아니라고 나라가 정해 놓은 보장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너무 안타까운 거죠. 차별받고 있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요. 앞으로 50년 후. 그때는 특수고용직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유명종 PD yoopd@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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