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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입력 2020.12.26 03:00

죽음이 일상화된 현실
국가와 자본의 공모로
내쳐지는 익명의 죽음에
우리 또한 무한책임이 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다. 대부분 익명의 사람들이다. 전쟁터이지만 재래전과는 다른 양상의 세계대전이다. 인류는 새로운 형태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전방이 어디인지 후방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몸이 튼튼한 자는 살아남고 허약한 자는 죽는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있다.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건너가고 있다.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끼여서, 부딪쳐서, 떨어져서, 맞아서 죽고, 때론 굶어서, 추워서, 병들어서, 고독하게 죽어가고 있다. 이 한 해 한을 품고 죽어간 사람들이 강을 이루고 산을 덮는다.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죽음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만도 화장장의 연기는 멈출 줄을 모른다.

죽어가는 자의 입장에서는 살아온 현실이 꿈이지 않았을까. 권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싸움이 일거리 없는 젊은 청년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젊은 시절에는 국가경제에 이바지한다고 고생을 감내했지만, 노인이 되어서는 내쳐지는 인생을 누가 위로해줄 수 있을까. 머나먼 타국, 차가운 이불 속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그와 그녀들을 위해 누가 눈물을 흘려줄까. 속고 속이는 난장판 속에서 타자의 죽음을 무관심하게 보는 이들도 언젠가는 이 사회로부터 무자비하게 내쳐질 것을 죽어가는 자들은 알고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자본이 사람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조은 감독의 <사당동 더하기 33>은 가난의 대물림이 어떻게 인생을 밑바닥으로 내모는지 잘 보여준다. 지혜원 감독의 <안녕, 미누>에서는 차별받는 이방인의 슬픔이 ‘목포의 눈물’이 되어 쏟아진다. 잡초같이 질긴 생명력도 구조화된 이 세계 내에서는 뿌리째 뽑혀간다.

국가는 죽음을 숫자로 통계내며 관리한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듯 그들은 ‘호모 사케르’이다.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자를 말한다(<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국가권력은 법이 작동하지 않는 예외 상태를 적용해 사회로부터 배제된 타자를 생산한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명분의 국민주권은 역설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인 백성을 경계 밖으로 내던진다. 효율과 통제를 위해 이제는 자본과 공모한다.

하비 콕스가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 하고, 슬라보이 지제크는 죽은 신의 부활을 역설하며, 테리 이글턴이 종교의 복원을 주장하지만 과연 변경 밖으로 추방당한 이들에게 누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국가와 자본이 관리하는 생명이 무가치해져 황야로 내쳐질 때 누가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 있을까. 종교는 두 카르텔의 충실한 시종이 되고 거간꾼이 되어 있지 않은가.

상한 갈대를 꺾지 말라고 한 예수는 죽어가는 자들을 애처롭게 보았다. 길가에 쌓인 인간의 뼈에도 경외심을 표출한 부처는 중생의 애달픔을 굽어살폈다. 그들은 거창한 교단이나 교세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직 스러져가는 중생의 아픔 속에 있었다. 이기심과 욕망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자들마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벌거벗은 몸이 되고, 스스로 약자와 병자와 이방인들 곁에서 함께했다.

죽어가는 그들은 나의 형제요, 자매다. 그의 존재는 나의 존재며, 그의 부재는 나의 부재다. 우리는 그들을 낭떠러지로 내몬 이 병든 문명에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채임을 느낀다. 나 또한 욕망의 연대 속에서 자아의 증식과 폭주에 길들여지고 이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더해지는 것은 예측 불가능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징후다. 이때, 변방인, 낙오자, 예외자들을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슬프게 애도하며 하늘에 부탁한 성자들이 다시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염치없지만, 죽은 자들이 희망의 북극성이 되어 살아남은 자들을 인도해주길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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