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경력 동안 피트니스센터 6곳을 거친 트레이너 박서연씨(29·가명)는 요즘 7번째 센터를 물색 중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가쁜 호흡이 오가는 피트니스센터는 코로나19 사태로 큰 타격을 받았다. 수강생이 줄어들었고, 방역 방침에 따라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트레이너의 처우는 좋지 않았다. 4대 보험에 들어본 적이 없고, 월급을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센터에 고용돼 하루 9시간을 상주했고 일정 수준의 기본급을 받았으니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센터는 트레이너들을 프리랜서로 대우했다. 박씨는 “불합리한 일이 굉장히 많다”면서도 “‘똥 밟았다. 앞으로 성공하면 된다’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노조, 직능단체가 없어 부당한 일을 당해도 의견을 전할 통로가 없었고, 경찰·노동청 등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웠다. 소수집단인 트레이너들 처우에 관심을 두는 미디어도 없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주요 기구들은 박씨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집합 종교시설들이 문을 닫으면서 이정자씨(81·가명)의 삶도 멈췄다. 2019년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살아온 이씨가 바깥과 소통할 기회는 일주일에 3~4번 구역별 모임, 봉사활동, 예배를 다니며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젊은 사람들과 달리 학교, 동거 가족, 직장이 없는 그에겐 종교활동만이 유일한 소통 통로였다. 홀로 집에서 하루 종일 TV를 틀어놓자 환각·환청이 왔다. 정정했던 그는 몇 달 만에 몸무게가 10㎏이나 빠졌고, 결국 치매 판정을 받았다. 이씨는 지역 데이케어센터에 다니면서 조금씩 호전됐다. 아침마다 ‘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의 삶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었다. 요양시설 관련 확진자들이 무더기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지만 이씨는 이 소소한 일상이라도 유지되길 바랄 뿐이다. 이씨의 담당 복지사는 “취약한 노인들에겐 ‘거리 두기’가 곧 관계, 돌봄 서비스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정신·육체 건강의 악화로 이어지기 쉽다. 젊은 사람들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피아 구분이 뚜렷한 이슈, 특정 집단의 관심을 받는 이슈, 다수 유권자의 표를 모을 수 있는 이슈, 대중의 공분을 자극하는 이슈는 두드러진다. 반면 트레이너, 쇠약한 노인, 종합부동산세를 낼 일 없는 지방 소도시 세입자, 기후변화로 황폐해진 바다에서 물질하는 제주 해녀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2021년 경향신문은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를 ‘흑백 민주주의’라 불러보기로 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의 목소리가 있지만, 정치권과 공론장에는 양극단의 목소리만 크게 울린다. ‘너는 흑이냐, 백이냐’라는 윽박지름이 이어진다. 목소리 낮은 시민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조명 속에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린다. 정치학자·사회학자·경제학자·페미니스트·생태주의자·문학평론가·노동운동가 등 60여명에게 한국 사회 민주주의와 공론장의 형태를 물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서울 등 대도시 중상층의 의견이 공통감각인 것처럼 과잉대표돼 있다”고 말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는 “ ‘의제’란 자신의 입장에서의 유불리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을 분석하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과정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 승패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연구자 야스차 뭉크는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당신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여기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답변을 인용했다. 1980년대생 이후인 밀레니얼 세대 중엔 29%만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의 젊은이들 중에서도 민주주의에 실망을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새로운 세대들의 불만과 불안을 해결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경향신문이 공공의창, 피플네트웍스 리서치와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97.2%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민들 비율 역시 48.5%에 달했다. 두 비율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촛불 이후 민주주의’의 과제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정부의 빠르고 정확한 대응을 넘어, 공동체의 연대와 신뢰가 재난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다가올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양한 목소리를 고르게 존중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