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되는 사람들
문재인 정부의 3년6개월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실험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촛불집회, 댓글, 정책 제안 등을 직접민주주의의 예시로 거론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서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에는 정부 관계자가 직접 답했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여부는 공론화위원회에 맡겨졌다.
정작 묻지 않은 질문들이 있다. 시민은 오늘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에 만족하는가.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코로나19 확산 후 이 물음들은 더 절실해졌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에 따라 재난에 대한 대응의 효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2021년을 앞둔 지난 12월,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021명을 설문조사했다. 비영리 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과 설문을 공동 기획하고, 피플네트웍스 리서치가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에서 총 24개 문항을 제시했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과 평가, 코로나19 확산 이후 불편과 정책적 대응에 대한 만족도 등의 문항으로 설문을 꾸렸다.
응답자의 대다수인 97.2%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봤다. 과반수인 51.5%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답변을 내놨다. 이는 나머지 48.5%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뜻이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민주주의 현실에 부정적
48.5%가 제대로 작동 안 된다 응답
취약계층일수록 부정적 평가 높아
“목소리 내도 정책 반영 안 돼”42.4%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데는 대다수 시민이 동의했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시민의 의견을 고루 반영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본인이 가진 문제가 사회 이슈로서 잘 다뤄지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목소리를 내긴 하지만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42.4%)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생업에 바빠서 시간이 없다’(20.0%), ‘목소리를 낼 창구가 없다’(15.5%)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시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넘어, 목소리를 낼 기회 자체가 없다고 인식하는 시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터 등 일상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때 어디서 도움을 받느냐’는 질문에도 공식 기관을 외면한 시민이 많았다. 28.1%의 응답자가 ‘경찰·검찰·노동청·인권위 등 국가기관’을 거론했지만, ‘가족’이라는 답변이 23.0%, ‘없다’도 14.4%였다.
스스로를 취약계층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전체 응답자의 37.3%가 자신을 취약계층으로 봤다. ‘한국 사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들 중 55.7%가 ‘매우·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취약계층이 아니라고 답한 이들은 반대로, 55.8%가 한국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시선
긍정 평가 첫 이유 ‘개인 권리 보장’
부정 평가 39%는 “사회 갈등 증폭”
‘시민 참여·행동’ 중요한 요소로 꼽아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긍정 평가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때문’(30.9%)이었다. ‘부당한 권력을 감시·제어할 수 있기 때문’(26.9%), ‘다수가 원하는 의견이 반영되기 때문’(20.2%) 등의 선택지도 다수 표를 받았다.
다만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봤다. ‘사회 갈등이 오히려 증폭돼서’(39.5%), ‘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20.0%)가 답변 1·2위를 차지했다. ‘내 삶이 나아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16.9%)라는 답변도 많았다.
민주주의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시민의 직접 참여와 행동’(30.0%)을 꼽았다. ‘사회적 갈등·균열을 대표하는 정당 등 대의기구’를 답한 경우는 7.3%에 그쳤다. 해당 선택지는 통상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대의제)에 대한 설명으로 분류된다.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요소에 따라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시민의 직접 참여와 행동’을 고른 응답자 3명 중 2명(67.2%)은 현재의 민주주의에 만족했다. ‘사회적 갈등·균열을 대표하는 정당 등 대의기구’를 고른 응답자들은 반대로 3명 중 2명(67.3%)이 민주주의 작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직접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시민 다수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긍정 평가한 반면, 대의 기능을 중시하는 시민들은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감염보다 가난이 두렵다
코로나19 이후…“가난이 더 두렵다”
취약계층선 감염보다 경제난 우려
72%가 정부·정치권의 대응에 불만
시민들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가장 힘든 점으로 경제적 어려움(36.6%)을 꼽았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34.8%)도 그 못지않게 큰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가장 어려운 점에 대한 인식도 계층에 따라 달랐다. 취약계층에선 52.2%가 경제난을 이야기한 반면, 취약계층이 아닌 시민들은 27.3%만이 경제적 어려움을 거론했다. 후자에선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38.7%로 경제적 곤궁보다 더 컸다. 17.9%는 관계 단절을 어려움으로 꼽았다. 감염 두려움 28.3%, 관계 단절 9.7%인 취약계층 응답과 대비되는 수치다.
코로나19를 비롯한 위기·재난 상황 극복을 위해 시민들은 정부·정치권의 적절한 대처(39.7%)가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공동체의 연대와 단결(26.1%), 개인의 노력(21.8%)이란 응답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의 사회적 어려움을 정치권이 잘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응답이 두드러졌다. ‘매우 그렇지 않다’ 34.4%, ‘대체로 그렇지 않다’ 30.2%로 3분의 2 이상이 정치권의 대응에 불만족을 표했다.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인식할수록 불만족도가 높았다. 취약계층이라고 답한 응답자 중 42.9%가 자신의 어려움을 정치권이 ‘매우’ 잘 다루지 못한다고 답했다. 대체로 잘못 다룬다는 답을 합하면 71.9%에 달한다. 반면 취약계층이 아니라고 답한 응답자 중에서 정치권의 대응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한 비율은 29.4%에 그쳤다.
상황 인식에선 차이를 보였지만 동료 시민에 대한 연대·배려의 마음은 컸다. ‘방역을 위해 개인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문항에 시민 5명 중 3명이 ‘내가 방역에 협조하지 않으면 다른 시민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58.2%)이라고 답했다.
‘내가 희생한 만큼 결국 나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기 때문’(31.6%)이란 응답도 많았다. ‘정부나 기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법적 처벌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4.2%)이나, ‘다른 사람이 비난하기 때문’(3.1%) 등 처분·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큰 이유가 되지 않았다. ‘불편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 응답한 시민은 2.9%에 불과했다.
‘공공의창’은 리얼미터, 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 등 14개 여론조사 및 데이터 기관이 2016년 비영리 공공조사가 필요하다는 뜻을 모아 출범한 단체로, 정부나 기업의 의뢰를 받지 않고 비용을 자체 조달해 공공조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