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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위안부 손해배상 판결을 보는 시각

입력 2021.01.18 03:00

수정 2021.01.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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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The king can do no wrong)’는 18세기 영국의 법학자 블랙스톤이 <영국법 주해>에 적은 말이다. 국왕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엔 왕권의 신성을 인정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민족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이 법언은 ‘국왕’이 ‘국가’로 바뀌고 국가행위(act of state)에 대한 면책 주장으로 이어졌다. 영미법계의 이 법리는 국제관습법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주권면제 이론이다. 어느 주권국가의 행위는 그 동의가 없는 한 다른 주권국가의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권은 국왕이든 국가든 그런 유의 신성불가침을 인정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으로 미증유의 반인도적 범죄를 경험한 인류는 새로운 법적 상상력으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도쿄 전범재판을 이루어 냈다. 인도에 반하는 죄가 국가행위의 탈을 쓰더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관념은 인류 역사에서 혁신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국제형사재판소나 르완다·캄보디아·유고슬라비아에서 저질러진 반인도적 범죄를 처벌하려고 만든 유엔 전범재판소 역시 이와 같은 이념의 산물이다. 주권면제 이론에 대해서도 세계적으로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은 ‘외국주권면책법’을 제정해 주권면제 이론을 입법화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그중 하나는 테러를 일삼는다고 미국이 지정한 나라에는 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유족이 2018년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받은 것도 이 예외에 근거를 두었다.

보편적 인권은 ‘주권의 벽’ 넘어서
위안부 피해, 반인도적 범죄 해당
사법의 본령 ‘정의의 선언’에 있어
판결의 실효성 찾는 건 외교 영역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지난 8일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자 어느 일간신문에서 ‘일본을 상대로 갈 데까지 간 한국 법원의 모험주의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진입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법원은 모험 따위를 하는 곳이 아니다. 판결은 본질적으로 숙고의 소산이다. 이번의 판결에서 지적되었듯이, 1965년의 청구권협정도 일본 최고재판소도 모두 피해자들의 권리를 외면했다. 협상력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이번 소송은 마지막 구제수단이었다. 왜 소송을 하고 왜 판결을 하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다. 책임은 피해 보상에 필요한 정치력·외교력이 부족했던 대한민국 정부와 뻔뻔스럽게 인권침해를 부인해 온 일본 정부에 물어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조직적·계획적으로 운영한 위안부 제도로 저지른 반인도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반인도 범죄로 피해를 입은 경우 주권면제라는 장벽을 넘어 손해배상을 명한 판결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2004년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루이지 페리니가 독일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내렸다. 독일의 제소를 받은 국제사법재판소는 2012년 무력충돌 상황에서 국가의 무장병력이 상대국 국민의 생명·건강·재산 등을 침해한 경우에도 주권면제가 인정된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법원 판결이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판결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에 따르는 취지의 법률을 만들었지만, 그 나라 헌법재판소는 다시 2014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주권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보편적 인권의 보호 가치는 주권의 방호벽을 뛰어넘는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리니 사건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 중 3인은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주권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다수의견에 찬동하면서도 별개 의견을 낸 코로마 재판관은 “이 판결은 국제인도법을 위반한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해 둔다”라고 적었다. 어느 날 국제사법재판소의 견해도 바뀔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판결을 내려봤자 사실상 강제집행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법원은 강제집행을 할 수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가며 판결을 내리는 곳이 아니다. 사법의 본령은 정의의 선언에 있다. 이 판결의 실효성을 찾는 일은 외교의 영역이다. 이 사건을 한·일 간 분쟁이라는 틀 속에서만 보려는 견해도 편협하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국가적 차원의 성폭력이다.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는 이 야만적 행위에 대해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사법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판결의 의미를 찾아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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