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있다.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했다. 둘레가 12㎞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전쟁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이다. 크게 동(광주), 서(강화), 남(수원), 북(개성) 4개권역으로 수비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성을 남과 북으로 지키는 튼실한 산성 역할을 했다.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한산성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이것은 어느 한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 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때 임금은 한양 도성에서 나와 머무르는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했다.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 규모로 지었다. 성안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여력도 지녔다. 성 안에 있는 수어청은 성곽을 따라 적을 감시하고 경계를 서기위해 세워진 목조 2층 건물이다. 산성에서 가장 높은 일장산(453m)정상에 세워 성곽 안쪽은 물론이고, 멀리 서울~용인~고양~양주~양평 까지 조망되는 전망대였다.
남한산성은 1954년 한국에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행궁터에 남한산성과 관련된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진열관이 지어졌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됐다. 남한산성을 통과해 성남으로 이어지는 308번(342번) 지방도의 도로 포장이 진행됐으며, 문화재 보수 복원 작업 또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남한산성 문화재를 보호하고 공원의 시설물을 유지·관리하는 남한산성관리사무소도 개소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자가용 시대가 열리면서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 마을은 서울 인근의 관광 휴양지로 바뀌었다. 이후 지자체, 지역문화단체 등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의 경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