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사랑 아닙니다, 범죄입니다

그루밍 성범죄 서사와 유사한 패턴의 동화를 써온 ‘서연이 시리즈’의 인기 동화작가 한예찬씨가 아동 성추행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그의 책을 출간해온 출판사가 서점에서 책을 회수했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의 특성을 인지하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에 대해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연합뉴스
최근 아동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동화작가 한예찬이 2년6개월간의 재판 끝에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한씨가 “교사와 아동 사이의 심리적, 정서적 신뢰 관계를 이용해 추행 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 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법정 구속했다. 한씨의 책이 여전히 유통되는 것에 항의가 이어졌고 출판사는 책을 회수하기로 했다. 단순히 범죄자의 창작물이라서가 아니다. 용인시 수지구의 느티나무도서관 박영숙 관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한씨의 책을 직접 읽어보니 그루밍(길들이기 수법을 통한 성범죄) 위험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성범죄자)가 피해자를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착취하기 전 대상의 호감(취미나 관심사 등 파악)을 얻고 신뢰를 쌓는 등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상태에서 자행하는 성범죄”이다. 앞선 판결에서 “교사와 아동 사이의 심리적, 정서적 신뢰 관계를 이용”했다는 대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루밍(grooming)은 마부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 말끔하게 꾸민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동물의 털 손질이나 몸단장을 의미한다. 동물이 서로 털을 다듬어 주듯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쌓은 후 가하는 성폭력은 피해자가 피해를 인지하기 어렵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교류하기에, 그루밍 성폭력의 특성을 모르는 외부인은 자의적인 선택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루밍 성폭력이라는 개념 자체도 비교적 최근에 알려졌다.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도, 복지시설의 운영자와 아동, 의사와 환자처럼 권력관계나 심리적 의존 관계가 있을 때 빈번하게 발생한다.
한씨는 성추행 혐의로 경찰 수사와 재판을 받던 기간에도 집중적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 중 성인과 미성년자의 사랑 또는 친밀한 관계를 다룬 내용이 여럿이다. 잠깐 몇몇 줄거리를 들여다보자(보기 싫지만…). <사랑에 빠지는 요술 초콜릿>에서 10대 여자 주인공은 취업준비생인 성인 남자를 짝사랑하다가 요술 초콜릿을 먹고, 그와 같은 나이가 되고 싶다고 빈다. 성인 남자가 중학생이 되어버리고, 성인 여자친구도 있던 남자는 주인공에게 의존하다 사랑에 빠진다. <딱 99일간만 널 사랑할 수 있어>는 남고생의 여자친구가 알고 보니 20년 뒤의 미래에서 온 (실제로는) 서른여섯 살이라는 설정이다. <신데렐라는 미녀를 만든다>는 외모 콤플렉스가 심한 여고생이 마법의 앱을 통해 제한된 시간 동안 변신할 수 있고, 그 시간 동안 채팅에서 사귄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내용이다. 오후 4시부터 12시까지. 물론 비밀이다.
10대 여학생이 어른으로 변신해
성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남고생의 여자친구가 실제로는
미래에서 온 36살 성인이고…
어른과 미성년자 사랑 소재로 쓴
한씨의 책들을 보면 ‘쎄하다’
상대적 약자와 친밀감 형성 뒤
‘특별한 관계’라는 이름으로 포장
그루밍 성범죄의 전형적인 수법
영화·소설 등 대중문화 속
낭만화와 아름다운 연출 뒤에 숨은 착
취와 욕망을 다시 검토할 필요
여자 어린이가 성인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이러한 변신 소재는 마법소녀물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성인은 전지전능의 상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한씨의 책에서 그루밍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등장인물의 욕구가 향하는 방향과 전체적인 메시지 때문이다. 대표작과 여러 감상문을 수박 겉핥기 하면, 한씨의 책은 ‘세간’의 편견이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가치는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동·청소년에게도 러브스토리는 흥미로운 소재지만, 사랑을 찾고 유지하는 데 결핍과 비밀이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는 점이 ‘쎄하다’.
한씨의 책에는 한부모 가정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다양한 가족상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당연히 아니다. 주인공은 감정적으로 외롭다. 이 자리를 채우는 것이 비밀스러운 상대와의 연애 감정이다.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는 심리적, 경제적으로 취약한 피해자를 노린다. 관계를 비밀로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나이 차이처럼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더 위험해진다. 그루밍 성폭력의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가 관계를 비밀에 부치고, 피해자를 고립시키거나,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위력 관계가 발생하는 요소를 극복해야 할 편견, 사랑의 장벽쯤으로 치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동·청소년이 ‘그렇게까지’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사랑을 쟁취할 필요가 있을까? 더 어리고 취약한 상대만 고르는 것이 사랑일까? 낭만화와 아름다운 연출은 무엇을 은폐하고, 어떻게 상대적 약자의 감정을 착취하고, 누구의 욕망을 정당화할까? 팟캐스트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0)를 ‘환생 판타지가 미화한 그루밍 성폭력과 강요된 동반자살’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이병헌)는 사랑했던 여자 태희(고 이은주)의 죽음을 겪는다. 17년 후, 국어 교사가 된 인우는 태희가 환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제자 현빈(여현수)을 사랑하게 된다. 인우는 태희가 생전에 약속했던 대로 현빈과 함께 뉴질랜드에 번지점프를 하러 가서 동반자살한다. 당시 영화는 퀴어 영화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물론 “사랑을 느끼는 신비한 기억…”이라는 낭만적 카피로 큰 화제였다. 자살하며 다음 생을 약속하는 두 사람의 대사는 ‘몇 번을 태어나도 다시 너를 사랑한다’와 같은 순애보뿐만 아니라, 성별도 뛰어넘는(!) 사랑의 상징 같았다.
팟캐스트에서 이수정 교수와 이다혜 기자는 인우가 현빈의 휴대폰을 훔쳐보고 메시지를 지우거나, 밤늦게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행동, 교사의 편애가 학생들 사이에서 권력관계로 작동한다는 점(그래서 거부하기 힘들고, 학생이 원하기도 한다)을 지적한다. 현빈의 여자친구를 질투한 인우가 교사의 지위를 이용, 수업 시간에 여자친구를 괴롭히는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것은 모두 인우의 절절한 사랑 표현이다. 도대체 17년 전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결혼도 했으면서… 수절이라도 하든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지만. 혼란스러워하는 현빈 앞에서 왜 자신을 못 알아보냐고 원망하면서 질질 운다. 한국 사회에서 연장자는 죄책감을 주입함으로써 손쉽게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 그 장면은 감정적 통제가 발생하는 순간이며 낭만적이지 않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고아 주디(제루샤 애벗)는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에게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써야 한다. 사랑을 느꼈던 친구의 삼촌 저비스가 나중에 키다리 아저씨로 밝혀지면서, 둘은 결혼한다. 저비스는 처음부터 편지로 주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후원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질투하고 제지한다(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열네 살이다). 저비스는 주디를 만날 때 후원 내내 자신의 정체를 숨겨서 얻은 정보를 이용한다. 이것은 성인 남성이 채팅 앱으로 자신의 정보를 조작한 채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접근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디지털 그루밍 성폭력 과정과 유사하다. 명작을 모욕하지 말라고? 작품의 의미나 해석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폭력과 착취가 로맨스의 탈을 쓰고 곳곳에 포복해 있으니까. 더 열심히 찾아내서 모욕해보자. 널리 읽히는 작품일수록 그 안의 규범이나 전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013년 한 기사는 <레옹> 블루레이 발매를 소개하며 “기존 극장판이 미국 관객층의 취향과 다소 보수적인 심의 기준에 맞춰 편집된 버전이라면, 감독판은 뤼크 베송이 전하고자 했던 레옹과 마틸다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솔직하고 대담한 해석을 담은 버전”이라고 썼다. ‘다소’ ‘보수적인’ 심의 기준. 8년 전 기사지만 문제의식의 수준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세상은 아동 성착취와 그루밍 성폭력에 둔감하다.
한씨의 ‘서연이 시리즈’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서연이’는 2010년대 우리나라 여성 어린이 이름 가운데 1위를 차지한 이름” “많은 여성 어린이들이 서연이의 사랑을 자신의 사랑에 대한 모델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려한 누리꾼의 의견을 읽었다. 가까이 있는 책과 어린이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비슷한 유형의 사건을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한씨는 오랫동안 인기 있는 동화작가로 활동하며 성폭력을 저질렀고 그루밍 성범죄 서사와 유사한 패턴의 동화를 생산하고 유통했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것은 개인을 악마화하고 폐기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의 특성을 인지하고, 어떤 콘텐츠를 공급할 것인지, 판타지로서 서사를 접하는 아동·청소년이 어떤 환경에 있는지 지속해서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