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지루

프랑수아즈 지루(1916~2003)는 시대를 앞선 여성 인물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작가이자 언론의 정도(正道)를 잊지 않은 언론인이었다. 동시에 ‘권력의 희극성’을 이야기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사진은 1997년 출간한 자서전 <나는 행복하다>의 표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관, 장관이 가진 권력, 재량권은 실제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다. 의안을 조금이라도 내놓을라치면 행정부에 맞서, 국무총리에 맞서 논쟁을 벌여야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대통령과 맞서 싸우기도 해야 하는데, 그쯤 되면 장관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의견이 있을 때는 처음부터 국무총리의 뜻을 너무 거스르지 않는 게 이롭고, 어쨌거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엄격히 ‘정책 노선에 들어맞는다’라는 걸 입증할 수 없을 바에야 공론화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프랑수아즈 지루의 아버지 살리흐 구르드지는 터키 전신국 설립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터키가 독일 동맹국으로 참전할 조짐을 보이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살리흐 구르드지는 1915년 터키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 1916년에 태어난 프랑수아즈 지루에게 아버지의 터키 시절 이야기는 전설과도 같았다. 프랑스에서는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루의 아버지는 점차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프랑스로 망명한 아버지가 죽고
지루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타자 속기사가 됐다
이후 꿈이 현실을 압도한 순간
영화판에 뛰어들어 중심에 섰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랑수아즈 지루가 여덟 살 되던 해인 1924년 살리흐 구르드지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루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집이 가난하다는 걸,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타자 속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당장 500프랑의 학원 수업료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고심 끝에 먼 친척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첫 월급을 받으면 돈을 꼭 갚겠다고 애원했다.
지루는 1분에 130단어를 기록하는 정식 타자 속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마침 “애서가(愛書家)들을 위한 서적상에서 타자 속기가 가능한 판매 여직원을 찾고 있었다”.
14세의 프랑수아즈 지루는 서점에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책을 팔았다. 지루는 서점에 있는 200권쯤의 책들을 일 년 만에 다 읽었다. 보들레르, 볼테르, 톨스토이, 디드로, 스탕달 등등의 ‘알짜만을’ 탐독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글을 쓰고 싶었다. 타자 속기사는 당시로서는 꽤 안정적인 직업이었고, 자신에게 ‘가족의 밥줄’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였다. 무엇이 ‘사리에 맞는 일’인지 묻고 또 물었다. 꿈이 현실을 압도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1932년 마르셀 파뇰의 <파니> 현장에서 영화 업무를 시작했다. 서점에서 속기사로 일하며 미친 듯이 책을 읽었던 것이 얼마나 큰 자산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흡입력 있는 대사를 척척 써 내려갈 뿐 아니라, 특유의 친화력으로 촬영 현장을 이끌어가는 지루의 역량이 영화계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1937년 지루는 피에르 콜롱비에 감독의 조감독이 되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2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던 친구가 프랑수아즈 지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루는 “연락책 역할을 하고, 송신기와 무기를 보관하고, 비밀부대 사령관 피에르 드쥐시외에게 은신처를 마련해주는” 일을 맡았다. 지루는 매우 강인했다. “나는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는데, 그것은 육체적 속박이 아니라, 나 자신의 정신적 저항을 시험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1945년, 종전 소식을 듣고 지루는 크게 감격했다.

1950 잡지 편집장
1945년 창간한 여성잡지 ‘엘르(Elle)’ 편집장으로 일하던 시절의 프랑수아즈 지루(1950년).

1968 기자
‘렉스프레스(L’Express)’ 기자 시절의 지루(1968년).
프랑수아즈 지루는 1945년 창간된 여성 잡지 ‘엘르(Elle)’에 기사를 쓰면서 거취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엘르’의 대표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여러 달 꼼짝할 수 없게” 되면서 지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엘르’를 맡아줘요. 당신 말고 누가 할 수 있겠소?” ‘엘르’의 편집장이 된 지루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잡지사가 발전해가는 순간마다 큰 기쁨을 느꼈다. 7년 동안 ‘엘르’와 함께 성장한 지루는 “다른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 용기를 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 간결함과 리듬감, 생생한 현장성이 담긴, 바로 저널리즘이었다.”
‘렉스프레스(L’Express)’ 창간호는 1953년 5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간지 반절 판형에 총 12면으로 발간되었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하루 10시간씩 일했다. 특종을 터트렸다. “한창 전쟁 중이던 인도차이나에 대한 엘리와 살란, 두 장군의 비밀보고서를 공개한 일이었다.” ‘렉스프레스’는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프랑스가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신문 판매 금지 조치를 결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 세계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렉스프레스’의 명성이 높아졌다. 전화위복이 일어났다. 1953년 사무실 세 개로 출발한 작은 신문사에 “내로라하는 기자들”이 합류했다. 195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악도 ‘렉스프레스’에서 “아무리 사소한 기사라도 내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는 의지로 글을 썼다. 그러나 신문사 운영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드골 정권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지루는 힘들 때일수록 언론의 정도(正道)를 잊지 않고자 노력했다. 독자들은 ‘렉스프레스’를 외면하지 않았다. 1970년이 되자, ‘렉스프레스’는 명실상부한 “대형 신문사” “영향력 있는 주간지”가 되었다. 프랑스 최고의 특수교육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 졸업생들도 ‘렉스프레스’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 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언론인에게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즈 지루는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접전 끝에 중도 성향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승리했다. 그런데 대통령 당선자가 ‘렉스프레스’로 찾아와 지루에게 “각료직을 제안”했다. 68혁명을 겪으면서 여성 인권 향상의 필요성을 절감한 데스탱은 지루에게 여성부 신설을 일임하고자 했다. “대다수 각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도발적인 선택이었다.”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시대적 열망과 대통령의 진정성이 지루를 움직였다. 지루는 “우선 배웠다”. “정부에서 쓰는 용어와 행동 규범, 그 모든 세세한 것들에 대해서… 배웠다.” 지루는 여성부 장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75 여성부 장관 1974년 프랑스 여성부 장관으로 임명되며 정계에 입문한 지루(왼쪽)와 시몬 베유 당시 복지부 장관(1975년).
잡지 편집인·신문 발행인을 거쳐
신설된 여성부 장관에 임명됐다
여성 차별적 규정을 없애고 나서는
전기 작가라는 새 삶을 시작한다
장관의 임기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시급한 현안부터 챙겼다. “첫번째 할 일은 노동법과 다른 제반 법률 조항에서 여성 차별적인 규정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다양하고도 비중 있는 100개 조항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몇몇 여성들이 파격적인 승진을 할 수 있도록 기업인들과 대통령을 상대로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쳐야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자크 시라크 총리는 “현 정부가 한 가지 잘한 게 있다면 여성 정책밖에 없을 거요”라는 말로 프랑수아즈 지루에게 감사를 전했다.
1976년 프랑수아즈 지루는 여성들을 위한 계획안이 완성되자, 데스탱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번에는 신임 총리 레몽 바르가 지루에게 “1년도 채 안 되는” 임기의 문화부 장관직을 제안했다. 지루는 1977년 3월까지 문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박물관 기획 법률안을 가결시켰지만,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는 장관직에 적어도 2년은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루는 언론인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정치계와 그 세계의 법칙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지루는 ‘렉스프레스’에서 다시 “말과 행동과 비평의 자유”를 되찾고 싶었다.

1987 전기 작가 정계 은퇴 후 전기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의 지루(1987년).
그러나 32개월간 각료 생활을 하는 동안 ‘렉스프레스’는 영국인 사업가 지미 골드스미스에게 매각되고 말았다. “새로운 사주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수아즈 지루가 ‘렉스프레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데스탱 대통령은 TV 방송사 ‘앙텐2’의 사장직과 유네스코 프랑스 대사직을 연이어 제안했다. 지루는 모두 거절했다.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권력 희극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3년간 장관으로” 있었던 지루는 오로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작업에 착수한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지루는 전기(傳記) 작가가 되고 싶었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마리 퀴리 평전 작업에 돌입한다. 장관, 잡지 편집인, 신문 발행인 등의 이력을 모두 내려놓고 마치 16세에 처음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뛰어들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지루는 국립도서관에서 마리 퀴리 관련 자료를 직접 찾으며 과학 공부에 매진했다.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쓴 초고를 마리 퀴리의 마지막 조수였던 베르트랑 골드스미스에게 건넨 지루는 지적받은 단 한 군데의 오류를 바로잡은 후, 1981년 마리 퀴리 평전을 출간한다.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1986년 지루의 마리 퀴리 평전은 영어로도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지루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루 살로메, 알마 말러, 제니 마르크스 등 여성 지식인 평전을 잇달아 발표했다.

1998 집필가 지루는 200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1998년).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그는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게 살기를 다짐했다
1997년, 프랑수아즈 지루는 자서전 <나는 행복하다>를 출간한다. 지루는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아픔을 어렵게 털어놓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아들 알랭이 스키를 타러 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날로부터 자서전은 시작된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아들은 눈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40년 “미혼인 데다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임신한 지루는 당시 낙태가 금지된 프랑스 사회에서 의사에게 애원도 해보고 “최악의 민간요법”도 동원했지만 결국 ‘미혼모’가 되었다. 모자(母子)는 줄곧 애증의 세월을 보내다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이다. 분초를 다투며 살아 왔지만,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지루는 인도에서 한동안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사라졌다. 지루는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장관직에서 물러나자, 많은 사람들이 프랑수아즈 지루의 정치적 행보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지루는 권력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평전 작가로 활약하는 한편, 2003년까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기고했다. 지루는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지루는 “내일이나 모레의 일”을 걱정하는 대신 “활기차고 아름다운 오늘”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루는 인간의 삶을 깊이 관찰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며,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장관 내려놓고 방송사 사장·대사직 거절…‘권력의 희극성’ 알기에](https://img.khan.co.kr/news/2021/03/02/l_2021030201000006900007326.jpg)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