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의 연애는 ‘유해 매체’가 아니다

SBS가 설 특선 영화로 방송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삭제된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와 그의 연인 짐 허턴(에런 매쿠스커)이 입 맞추는 장면. 미국의 성소수자 관련 잡지 ‘아웃 매거진’은 해당 장면과 함께 이 논란을 보도했다. ‘아웃 매거진’ 기사 캡처
8년 전, 나는 독립잡지 ‘계간홀로 :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창간했다. 당시 잡지는 무가지였는데, 농담으로 “솔로는 무료, 커플은 1000원 내세요”라고 말하면서 나눠줬다. 얼마 후 잡지를 공짜로 받은 친구가 커밍아웃했다. 연애 중이었다. 나는 최저가로 찍어 만지는 족족 손에 검댕이 묻어나는 내 잡지로 팍팍 치고 싶었다. 무엇을? 내 이마를. 우리 사회의 편협한 연애 담론을 비판하겠다고 잡지를 낸 주제에 나는 아주 전형적인 실수를 했다. 친구를 이성애자로 전제하고, 주변에서 남자친구 있냐고 물을 때 없다고 대답하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연애의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친구를 ‘솔로’로 판단한 것이다. 연애 권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연애는 쉽게 비가시화된다. 잘 보이지 않으니 곧잘 없는 것 취급당한다. 성소수자나 그들의 연애는 가시화만으로도 논란과 징계 대상이 되기 일쑤다. 몇 가지 이슈를 보자.
‘15세 시청가’ 이유로 삭제 당한
‘보헤미안 랩소디’의 남남 키스신
아동과 청소년 보호라는 해명은
성소수자는 ‘유해’라는 기만 담겨
SBS는 2월13일 그룹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담은 음악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설 특선 영화로 편성하여 방영했다. 이 과정에서,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와 그의 연인 짐 허턴(에런 매쿠스커)이 입 맞추는 장면 등 머큐리의 키스신이 2회 삭제됐다. 배경 속 남자 보조 출연자 간 키스신 1회 또한 모자이크 처리됐다. 비판이 일자 SBS는 “지상파에서 15세 이상 시청가로 방송하는 설 특선 영화라는 점을 고려한 편집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와 제인 오스틴(루시 보인턴)의 키스 장면은 그대로 나갔다. 기준은 성적 접촉의 강도가 아니라 성별인가? 하지만 <시크릿 가든>(2010·SBS)의 코믹한 남·남 키스신은 살아남았다. 이 삭제는 <선암여고탐정단>(2015·JTBC)이 극 중 여고생끼리의 키스신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인 ‘경고’를 받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심의위원들은 “우리 사회의 인식이 동성애를 인정은 하되 권장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 징계를 주는 게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잖아요? <펜트하우스>의 살인과 불륜과 폭행은 권장해서 그대로 내보내나요?
안철수 국민의당 예비후보는 2월18일 제3지대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를 위한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퀴어축제에 대해 “차별에 반대하는 건 당연, 개인들의 인권은 존중돼야 마땅”하다면서도 “그런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 외곽 지역에서 열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퀴어축제를 예로 들었다. 이 발언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일자 안 후보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퀴어축제의 신체 노출이나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경우를 예로 들며, ‘아동이나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해명했다. 기만이다. 소수자의 삶은 유해 매체가 아니다.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선 그어놓은 아동과 청소년 중 성소수자가 없으리라는 자신은 또 어디서 나오시는지?
‘요즘에는 그래도’ 미디어에 소수자가 많이 등장하지 않냐는 질문, 좋다. 그중 특히 보수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수자 재현을 짚어보려고 한다. 분명 예전보다 자주 보이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정말 무슨 PPL 상품처럼 잘 ‘보이기만’ 하면 OK가 아니니까.
한국 미디어 속 성소수자는
주변인 혹은 ‘해프닝’으로 존재
주변부로 그릴 때엔 관용 베풀다
나와 같은 권리 누릴 땐 불편…
그건 분명 차별과 혐오다
동성 간 사랑이 드라마에 등장한 첫 사례는 1995년 단막극 <두 여자의 사랑>(MBC), <째즈>(SBS)이다. 일방적인 짝사랑이나, 성 정체성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내용이 주였다. 2003년 <완전한 사랑>(SBS)에서 승조(홍석천)라는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의 ‘쿨한 게이 친구 판타지’를 자극했다. 당시 소수자를 친근하고 긍정적으로 그렸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이색적인 볼거리 정도로 다뤄졌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시크릿 가든>에서 썬(이종석)은 좋아하던 오스카(윤상현)가 윤슬(김사랑)과 맺어지자 떠난다. <응답하라 1997>(2012·tvN)에서 호야(이호원)가 연기한 ‘준희’는 단짝 친구인 윤제(서인국)를 좋아하지만 윤제가 시원(정은지)을 좋아하자 마음을 포기한다. <굿와이프>(2016·tvN)에서 김단(나나)은 원작에서 양성애자고, 극 중에서도 양성애자라는 암시가 잠깐 등장한다(침대에 벗고 누워 있는 여자의 뒷모습). 제작진은 이에 대해 확실히 답하지 않았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심야 식당>(2015·SBS)은 원작에 꽤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는 게이 캐릭터가 사라졌다. <힘쎈여자 도봉순>(2017·JTBC)의 오돌뼈(김원해)는 민혁(박형식)을 짝사랑하며 봉순(박보영)을 질투한다. 얼마 전 종영한 <런온>(2020·JTBC)에서 예준(김동영)은 20년지기 친구 영화(강태오)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영화에게도 단아(수영)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이성애 전선 이상 없다.’
이쯤 되면 모르는 척하기 힘들 정도로 경향이 뚜렷하다. 다양성의 알리바이처럼 등장은 하는데 언제나 주변부의 인물이거나 ‘해프닝’으로만 존재한다(퀴어축제를 외곽으로 치워버리고 싶어 하는 안 후보의 말처럼). 혹은 동성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무례하게 대처하지 않는, 남자 주인공의 매력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된다. 징계를 피하는 선 안에서 쓰려다 발생하는 딜레마가 아닌가 싶다. 옴니버스 드라마 <더 러버>(2015·Mnet)에 짧게 등장한 커플을 제외하면, 소수자가 서사의 배경이 아니라 중심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아직 <인생은 아름다워>(2010·SBS)가 유일한 수준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는 처음 만나 부딪치다가 결혼하기까지, 여느 커플과 같은 과정을 거치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방영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적극적인 혐오자들의 공격과 보수적인 제작 환경이 김수현이라는 걸출한 스타 작가조차 옥죄었다. 태섭과 경수의 언약식 장면은 결국 삭제되었다. 이에 대해 김수현 작가는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기어이 잘라내라는 방송사의 요구에 이어 잘라낸다는 통고를 받았다”고 쓰며 분노했다. 키스신은 보수단체들의 강력 반발로 무산됐고, 시청자 게시판은 방영할 때마다 수천개 게시물로 뒤덮였다. 김수현이어서 가능했으나 김수현이어도 안 되는 것이다. 10년이 지났지만, 드라마 보조작가로 짧게 일했던 경력으로도 실감할 만큼 현재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철인왕후>(2020~2021·tvN)는 그래서인지 좀 더 교묘한 전략을 택한다. 불의의 사고로, 현대 남성 봉환(최진혁)은 조선 시대 중전 소용(신혜선)의 몸에 빙의한다. 자신을 남자라고 정체화한 봉환이 처음 생리를 경험하는 장면이나, 의복과 성역할을 어색해하는 장면은 FTM 트랜스젠더 서사로도 읽을 수 있다. 중전 소용의 몸으로 왕의 후궁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런데 이 ‘겉 중전 속 봉환’, 줄여서 ‘겉중속봉’은 자신의 남편 철종(김정현)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들은 사랑에 빠지고 합방해 임신도 한다. 겉중속봉은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동성애자, 범성애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말에서 봉환의 영혼이 현대로 돌아오면서 드라마는 완전한 이성애로 끝난다. 시청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중간부터 봉환과 소용의 감정이 동기화되었기에 동성애가 아니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어차피 결말은 이성애기에 남자 행세를 하는 은찬(윤은혜)에게 끌리는 한결(공유)의 고뇌를, 안전하고 즐겁게 동성애 ‘코드’로 소비했던 <커피 프린스>(2007·MBC)가 떠오른다.
여전히 보수적인 제작 환경 속
다른 방향 걷는 창작가가 있으면
비난보다는 응원과 지지 보내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누군가는 소수자 재현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기가 이입할 스토리가 많은 사람은 특히. 그러나 어떤 삶이, 미디어에서 그냥 눈에 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뜬금없이 타 먹는 홍삼이나 울면서 타는 휠보드 같은 ‘상품’이 아니라 서사와 존엄과 입체성을 지닌 존재니까. 주변부에 있을 때는 관용을 베풀다가 나와 같은 권리를 누린다고 생각하면 좀 불편해서 치워버리고 싶다면 그건 차별과 혐오가 맞다. 아무리 차별과 혐오는 나쁘다고 배웠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현실에서는 누구도 결백할 수 없다. ‘나’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고, 나의 소수자성이나 인격과 무관하게 종종 또는 생각보다 자주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자. 미디어에 등장하는 소수자를 보며 세상이 바뀌었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굳게 믿는 순간에도 말이다. 별개로, 쉽지 않은 제작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창작자 또한 많다. 당장 눈에 차지 않더라도, 한 발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디딘 이가 보인다면 비난보다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계간 홀로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