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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은 그분의 잘못을 내가 감내하게 만들었다
위력은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그 내용을 수백번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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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가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둘러싼 ‘2차 가해’에 대해 “이제 소모적 논쟁을 중단해주길 간곡히 부탁한다”는 입장을 직접 밝혔다. 박 전 시장 사망 후 252일 만으로 피해자가 편지 대독이나 변호인단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입으로 입장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해자 A씨는 17일 서울 중구 티마크그랜드호텔에서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는 사람들’이 연 기자회견에 참석해 “피해사실을 왜곡해 저를 비난하는 2차 가해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면서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 피해자는 시작부터 끝까지 저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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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인이 살아서 사법절차를 밟고 방어권을 행사했다면 사건의 진실에 좀 더 가까워졌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 전 시장의) 방어권 포기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제 몫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용서하고 싶다.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그분’과 남은 사람들의 위력 때문에 겁이 나서 하는 용서가 아니다. 저의 회복을 위해 용서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A씨는 직접 연단에 선 이유를 일상의 회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있어 말하기는 의미있는 치유의 시작이라고 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 사건의 피해자로서 제 존엄의 회복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또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당당하고 싶다. 긴 시련의 시간을 잘 이겨내고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주고 싶다”고도 했다.
이날 A씨는 기자회견 서두에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를 통해 밝힌 입장문을 통해 박 전 시장의 ‘위력’(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타인의 의사를 제압하는 힘)으로 인해 피해사실을 제대로 호소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A씨는 “그분의 위력은 그의 잘못이 심각한 수준이 돼도 내가 감내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위력은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그 내용을 다듬고 다듬으며 수백번 고민하도록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의 잘못으로 인해 제가 겪는 피해보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잃었을 때 제가 직면할 어마어마한 상황을 두려워하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저를 지속적으로 괴롭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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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의미로 기자회견에 참석한 여성단체 인사 등은 박 전 시장의 잘못으로 치러지는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 대표는 “보궐 선거에서는 본 사건으로부터 반드시 얻어야 했던 교훈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여기서 끝낼 수 없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시장은 지난해 7월 8일 전 비서에게 강제추행 및 성폭력처벌법위반(통신매체이용음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피소됐다. 박 전 시장은 다음날인 9일 오전 시장 공관을 나간 뒤 10일 자정 무렵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박 전 시장 사망 후 5개월 동안 수사를 벌였지만 피의자 사망으로 인해 이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25일 전원위원회를 열고 박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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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민 기자 5km@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