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 2교시가 끝나면 급식시간이었다. 당번들은 2교시가 끝나기 전 빵창고에 뛰어가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빵과 우유를 교실로 배달했다. 급식당번은 한 달마다 다시 뽑았는데, 나는 늘 급식당번 1순위 지원자였다. 당번은 공짜우유를 하나 먹을 수 있었다. 매달 바뀌는 다른 반 급식당번들보다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나는 빵창고까지 가장 단시간에 돌파할 수 있는 최단코스를 익히게 되었고, 북적거리는 빵창고에서 우리반 컨테이너를 재빠르게 낚아채서 숫자를 빠르게 확인하는 요령도 생겼다. 특히 소시지빵이나 크로켓과 같이 인기가 많은 빵이 나오는 날 기술이 빛을 발했다. 한 걸음 늦게 빵창고에 가면 빵이 늘 한두 개씩 부족했는데, 그럴 때면 곰보빵이나 팥빵을 대신 받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
이런 일이 발생하면 꽤 심각한 상황이 된다. 다행히(?) 한 개만 부족하면 늦게 간 급식당번이 뒤집어쓰는데, 두 개 이상이 되면 희생양을 누구로 해야 할지 갈등이 심해진다. 그 나이 때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이라면 양보하기 어려운 주제였고, 한 달에 겨우 두어번 나오는 특식이니 다들 예민했다. 그럴 때 눈치를 받던 친구들이 이른바 ‘쁘라스’ 들이었다.
플라스틱 빵 바구니에는 교실별로 신청한 학생들 숫자 뒤에 더하기(+) 표시를 하고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무료로 급식을 지원받는 친구들이었다. 누군가 쁘라스들은 빵도 공짜로 먹는데 이럴 때 양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푸념을 했고, 언젠가부터 빵이 부족할 때 곰보빵은 늘 쁘라스 몫이 되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면 그 친구와 늘 눈이 마주쳤다. 숫자만큼 소시지빵을 지켜낸 날이면 뿌듯한 눈웃음을, 그렇지 못할 때는 눈을 피했다. 다음번엔 더 빨리 가야지 하고 씁쓸해 했을 뿐, 왜 같은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친구들 중 누군가 쁘라스로 구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가난한 학생에게 이렇게라도 빵과 우유를 나눠줄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니냐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제도가 좋은 의도를 가지더라고 가장 중요한 원칙,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난다면 그 제도는 잘못된 것이다. 제 잘못도 아닌 가난을 또래 집단에 공개하고 증명해야 눈치빵 먹을 수 있는 제도보다는, 모든 학생이 먹을 수 있는 제도가 옳다. 가난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대부분 ‘차별’에 해당될 가능성이 크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에서 외국인노동자에게 코로나19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해 논란이 되고 있다. 비판이 거세지자 서울시는 행정명령을 철회했지만 경기도 등 다른 지자체는 검사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외국인노동자의 건강과 사업장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적 목적’이며 비용도 무료라고 안내하지만, 현장에서는 인종차별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일해온 노동자 중 외국인만 공개적으로 불러내 검사를 받으라고 하는 건 명백한 차별이다. 주말까지 선별진료소에 길게 줄서 있는 외국인들의 표정에서 그 시절 그 친구의 표정이 보인다. 방역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서는 외국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고 보편적 의료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