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EU 등 ‘위구르족 인권탄압’ 이유로 대중 제재 단행
중국, 러와 외교회담…김정은·시진핑 ‘구두친서’ 교환
강 대 강 대치 이어지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도 ‘불똥’
미국이 우방과 동맹국을 결집해 중국의 인권·민주주의에 대한 공세를 높이자 중국은 러시아·북한을 동원해 이에 맞서고 있다. 미·중 갈등이 세력 결집으로 이어져 신냉전 기류가 형성되면서 한반도가 미·중의 대결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북핵·남북관계 등 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들이 미·중 신냉전의 기류에 휩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미국의 중국 때리기 가속화
미국과 캐나다, 영국, 유럽연합(EU)은 22일(미국시간) 신장 지역 내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 인권탄압을 이유로 중국을 향해 동시다발로 제재를 단행했다. 미국과 중국이 지난 18~19일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열린 첫 고위급회담에서 인권 문제를 두고 충돌한 이후 서방국가들이 공동행동에 나선 것이다.
미 재무부는 이날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 인권탄압과 관련 왕쥔정 신장생산건설병단 당위원회 서기, 천밍거우 신장공안국장 등 중국 관료 2명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앞서 주하이룬 전 신장당위원회 부서기, 왕밍산 신장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등 2명에 대해 제재를 취한 바 있다.
EU와 캐나다, 영국도 각각 중국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미국이 제재한 중국 관료 4명과 신장생산건설병단 공안국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EU가 인권탄압과 관련해 중국을 제재한 것은 1989년 베이징 톈안먼 사태 이후 처음이다. EU는 북한의 정경택 국가보위상, 리영길 사회안전상, 중앙검찰소와 러시아 관리 등도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서방국가들이 같은 날 중국에 대해 제재를 단행한 것은 바이든 정부의 외교 노력에 따른 결과다. 유럽 국가들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 중국 업체 화웨이의 통신장비 퇴출을 비롯한 미국의 대중 압박 동참 요구에 미적였던 것과 대비된다. 미국·캐나다·영국 외교장관은 이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신장에서 벌어진 중국의 인권침해에 관한 심각하고도 계속되는 우려에 단합돼 있다”고 밝혔다.
이날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유럽 방문에 나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해 “중국의 군사적 부상과 서구를 위협하는 러시아에 대항해 나토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블링컨 장관은 EU 고위급 인사들과 만나 동맹 강화 방안과 러시아, 이란, 중국 등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집중 논의할 예정이다.
■ 중국과 밀착하는 러시아·북한
중국을 방문 중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3일 구이린(桂林)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회담한 뒤 “다른 나라들이 인권 문제를 정치화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위급회담에서 미국과 첨예한 갈등을 재확인한 중국이 라브로프 장관의 방중을 계기로 미국과 EU 등 서방의 공세에 대비한 ‘전략적 연대’를 강화한 것이다.
양국 장관은 공동성명에서 “주권국가가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택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다른 나라들이 인정해야 한다”면서 “민주주의에 표준 모델은 없다”고 강조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보다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더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며 “EU와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왕 부장은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중국의 진전을 막거나 역사 발전의 조류를 되돌릴 수 없다”고 강조했고, 라브로프 장관도 “다른 나라의 비우호적 행동으로부터 중국과의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했다”며 왕 부장 발언에 힘을 실었다.
북한과 중국의 최고지도자도 밀착하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이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적대세력들의 도전에 단결과 협력을 강화할 것”을 강조하는 구두친서를 보냈다고 공개했다.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이 ‘두터운 동지적 관계에 기초해 두 당 사이의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해야 할 시대적 요구에 따라’ 시 주석에게 구두친서를 보내 지난 1월 노동당 8차 대회 결정을 통보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친서에서 “(중국이) 적대세력들의 광란적인 비방·중상과 압박 속에서도 사회주의를 굳건히 수호하면서 초보적으로 부유한 사회를 전면적으로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괄목할 성과들을 이룩하고 있는 데 대해 자기 일처럼 기쁘게 생각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시 주석도 이에 “새로운 형세에서 중·조(북한)관계를 훌륭히 발전시키자”며 “중·조 친선은 두 당, 두 나라, 두 나라 인민의 공동의 귀중한 재부”라고 답했다. 시 주석은 또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을 위해 새로운 공헌을 할 용의가 있다”며 한반도 문제 적극 관여 의지를 드러냈다. 시 주석은 특히 “두 나라 사회주의 위업이 끊임없이 새로운 성과를 거두도록 두 나라 인민들에게 보다 훌륭한 생활을 마련해줄 용의가 있다”며 대북 경제지원 가능성을 시사했다.
■ 미·중 충돌 직면한 한반도
미·중 충돌이 우호세력 결집을 통한 신냉전 양상으로 발전하면서 한반도 상황이 복잡해지고 한국의 외교적 입지도 위협받고 있다. 특히 북한이 중·러와 우호관계를 강화하며 ‘반미 공동전선’을 구축할 경우 한반도 정세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조속한 북·미 대화 재개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구상도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북한은 말레이시아에서 활동하던 사업가 문철명씨가 자금세탁에 관여해 대북 제재 위반 혐의로 미국에 송환돼 재판을 받게 된 것에 대해 미국에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북·미 대화 대신 대결과 압박이 펼쳐질 가능성이 더 크다. 중국도 미국과의 대결 국면이 지속되는 한 북한을 대미 견제의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중국이 이에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국면이다.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한반도 문제가 미·중 갈등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가면 한국의 정책적 의지가 반영될 공간이 없어진다”며 “북한 문제는 미·중 갈등에서 가장 먼저 희생물이 될 수도 있지만 미·중 협력 단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부의 세심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