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가진 것들은 못되게 굴기 일쑤다. 내가 정말로 안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이 가족주의자가 되는 것이겠지만, 가족이 아동·청소년과 여성에게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명료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연중 가장 가족적인 명절에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약 두 배로 증가한다.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내가 만들어야지.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이거다 싶었다. 페미니스트를 모으면 안전한 공동체가 될 것 같았다. 3개월 만에 1000여명의 페미니스트가 모였고, 오프라인에서 100여명씩 모여 집단적 고양감에 취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온갖 분쟁과 논란 속에 규칙을 만들고 문제를 처리하는 데 1년 반을 썼다. 번아웃이 왔다.
다음이 비혼 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다. 구성원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지난 공동체 경험을 통해 문제의식을 가졌는가? 그럼에도 가족으로의 도피는 해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래도 어려웠다. 마주한 진실은, 공동체는 갈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을 대하는 방식이 우리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공동체는 유기체처럼 생겨나서 자라다가, 앓았다가, 또 다른 모습이 됐다.
기존 사회를 견딜 수 없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빠지기 쉬운 오류는 ‘정체성으로 사람을 모으면 그것으로 안전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틀렸다. 안전은 지향이고, 한 번 달성되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소수자의 임파워링(empowering)이다. 사회적 낙인을 내면화하고 쉽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학습된 것이 소수자라면, 상대와의 거리를 조절하고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특히 1의 피해에는 1만큼, 10의 피해에는 10만큼 대응할 수 있는 정확한 자기방어 능력이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질서 만들기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다. 공동체가 지켜야 할 가치, 폭력과 갈등에 대한 정의, 처리 방식에 대한 합의가 질서를 구성한다.
모든 공동체는 일정 부분 분리주의 공동체다. 세상에 그냥 ‘모두’를 위한 공동체 같은 건 없다. 모두가 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밤거리는 누구의 것이었나? 중요한 것은, 성원의 기준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여대에서 경험한 공간성에서 많은 걸 느꼈다. 여성은 왜 여성 공간에서 일정 부분 안전감을 느끼나? 소수자로서의 여성은 남성보다는 성폭력 가해의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일에 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대는 왜 해방공간인가? 내부의 질서를 오래 합의하며 질서를 구축해 뒀기 때문이다. 질문은 바뀔 수 있다. 그 질서를 누가, 왜 따르려 하는가?
학교를 다니며 트랜스젠더 벗의 글을 읽었다. 다른 벗들의 환대를 보며 여성 공간의 질서 속에 다양성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배웠다. 지난 22일 이대학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또 다른 트랜스젠더 박정한(가명) 벗을 위해 이 글을 썼다. 우리‘들’의 안전한 공동체를 위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