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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OB베어’가 사라져도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힙’할 수 있을까

입력 2021.03.26 16:26

수정 2021.03.26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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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근우 칼럼니스트

이집 맥주, 저집 노가리…‘끌리는 맛’ 따라 가는 맛을 앗지 말라

지난 10일,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원조로 불리는 을지OB베어에 대한 법원의 두 번째 강제철거 시도가 있었다.

지난 10일,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원조로 불리는 을지OB베어에 대한 법원의 두 번째 강제철거 시도가 있었다.

코로나19와 함께한 2020년엔 다들 일상적인 유희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여행, 공연, 전시, 고궁 방문, 하다못해 한가한 산책조차도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한여름 늦은 오후,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을지로3가역 근처 노가리 골목에서 생맥주를 마시지 못한 일이다. 소위 ‘힙지로’라는 별칭이 붙은 이후 골목 정취가 예전 같지 않다며 툴툴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만선, OB베어, 뮌헨호프, 초원호프, 4대 호프집의 맥주는 언제나 시원하고 맛있었고 노가리는 쌌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꼭 뮌헨호프 야외 좌석에 앉아 생맥주에 골뱅이무침을 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생이 골뱅이 깡통째 가져와 이거 다른 집과 달리 국내산 골뱅이라고 직접 확인시켜준 뒤 눈앞에서 따서 무쳐줄 때,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여주고 싶다. 하지만 만약 코로나19가 드라마틱하게 종식되어도 그 자리의 노가리 골목은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난 3월10일,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인 을지OB베어에 대한 강제철거 시도가 있었다. 지난해 11월 이후 두 번째 시도였다. 이번엔 시민단체, 인근 상인들과의 몸싸움 끝에 무산됐지만 언제 다시 세 번째 강제집행이 시도될지 모르겠다. 코로나가 지나간 자리엔 어쩔 수 없이 다양한 폐허의 흔적이 남겠지만, 그 모든 폐허의 이유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번 강제집행은 2018년 건물주의 재계약 거절 통보 및 명도소송 끝에 벌어진 일이다. 바로 소송을 진행한 탓에 상가건물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조정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고 최소한의 협상 절차 없이 법적 공방만 진행됐다. 1·2심은 건물주의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과거 서촌의 궁중족발 사태가 새로운 건물주의 합리적인 수준을 훨씬 벗어난 월세 인상에서 비롯됐다면, 을지OB베어의 경우엔 월세 인상도 감수할 테니 재계약 협상을 하자는 임차인의 요청 자체를 거부한 경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을 행사한 건물주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이 합리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젠트리피케이션 특수를 노린 ‘갭투기’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장사를 잘해 상가 및 상권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임대료를 제때 내는 임차인을 굳이 쫓아내지 않는다. 이번 일에 작전세력 같은 게 있을 거라는 음모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만큼 을지OB베어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을지로에서 쫓겨나는 것이 조금도 합당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절차상으로도 그렇고, 을지로의 미래 가치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1980년 을지OB베어 초창기에는 500원도 안되는 돈으로 500cc 생맥주 한 잔에 노가리 안주를 즐길 수 있었다.

1980년 을지OB베어 초창기에는 500원도 안되는 돈으로 500cc 생맥주 한 잔에 노가리 안주를 즐길 수 있었다.

지난해 여름엔 그러지 못했지만, 흔히 을지로페스트라 불리는 한여름 노가리 골목의 맥주 파티는 장관이다. 만약 을지OB베어 자리에 건물주 결정대로 또 다른 을지로 호프인 만선의 새 매장이 들어선다고 거리에서 맥주를 마시는 풍경이 아주 달라지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노가리 골목이라는 공간의 매력이 예전과 같을지, 힙플레이스에 놀러온 이들에게 재방문 의사를 생기게 할 만큼 다양한 경험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노가리 골목의 진정한 매력은 매장마다 각기 다른 맥주와 노가리 맛, 그리고 분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노가리 골목에 가장 많은 매장을 지니고 있는 만선은 굉장히 직관적인 맛을 추구한다. 가장 차가운 맥스 생맥주에 노가리 양념은 마치 라면스프처럼 맵고 짜되 중독적이다. 매장이 크고 많은 덕도 있겠지만 골목 내 다른 가게와 비교해 젊은 손님 비율도 가장 높다. 명백히 노가리 골목의 원조집이지만 굳이 그걸로 젠체하지 않는 노포 을지OB베어의 경우 머리가 띵한 시원함이나 탄산보단 풍미와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OB 프리미어 생맥주와 부드러운 연탄불 노가리가 매력적이다. 맥주 맛만 따지면 4대 호프 중 가장 훌륭하다. 다른 집처럼 치킨류의 식사를 대체할 메뉴가 없는 게 아쉽지만, 반면 다른 곳이 노가리를 제외하면 값싼 안주가 없는 것과 비교해 값싼 소시지 안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을지OB베어만의 매력이다. 만선 맥주는 너무 차고 OB베어는 덜 시원하게 느껴진다면 만선과 함께 맥스 생맥주를 취급하는 뮌헨호프의 맥주 온도가 딱 그 사이 즈음이다. 노가리는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 두 가지를 취급하는데, 친구와 갈 땐 두 가지 모두를 주문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사장님의 자부심이 큰지, 골뱅이무침을 시킬 때마다 캔을 따지 않은 상태로 가져와 설명을 곁들여주는 것도 뮌헨의 재미 중 하나다. 이곳에도 젊은이들이 많지만, 등산복을 입고 계란말이에 소맥을 마시는 중년들도 많이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 ‘힙지로’ 감성과 가장 동떨어져 보이는 초원호프는 딱 동네 호프 느낌이다. 손님도 젊은이보다는 중장년이 많다. 거품을 적게 따라주는 카스 생맥주는 탄산의 쏘는 맛이 강하고 깔끔하다. 역시 카스 생맥주를 쓰고 맥주 맛있기로 유명한 해방촌 신흥시장 노가리공장의 그것과 흡사하다. 다른 모든 가게가 돈을 받고 땅콩을 팔지만 초원에선 땅콩을 첫 잔 서비스로 준다. 골뱅이무침 하프 사이즈가 있어 배가 어느 정도 부른 2차나 3차에 문득 골뱅이가 당기면 초원에 가는 게 좋다.

서울 중구 을지로13길 19 일대 ‘노가리 골목’은 2015년 그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 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서울 중구 을지로13길 19 일대 ‘노가리 골목’은 2015년 그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 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그냥 노가리 골목이라고, ‘힙지로’라고 통칭하지만 맥주 맛과 안주 종류, 분위기와 매력이 각기 다른 가게가 모여 만드는 그 다층적 경험이야말로 을지로 골목의 정수다. 을지면옥에서 소주를 반주로 저녁식사 겸 평양냉면 한 그릇을 비우고, 2차엔 만선에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즐기다 3차엔 초원호프에서 좀 더 차분히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게 을지로의 재미다. 을지면옥 대신 역시 근처 노포인 동원집에서 하루 종일 고아낸 감잣국에 소주잔을 비울 수도 있고, 1차부터 각 호프집을 전전하되 배부른 안주는 피하다가, 어두워지면 발품을 좀 팔아 술꾼을 위한 출구 없는 미로인 인현시장에 들어가 그날 먹고 싶은 메뉴를 찾는 것도 을지로의 즐거움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서로 다른 개성의 가게들 사이에서 그날만의 동선을 짜보거나, 혹은 반대로 즉흥적으로 호객에 이끌려 안 가보던 아무 호프에나 앉아보는 것도 좋다. 이러한 즐거움의 반대말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획일화’일 것이다. 만선의 차가운 맥주와 자극적인 노가리 양념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노가리 골목의 거의 전부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계획되지 않고 오랜 시간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상권과 문화라는 것은 매끈하기보다는 시간의 퇴적물들이 덧대어진 흔적에 가깝다.

사라진 피맛골이 그러하듯 갈수록 역사 없이 매끈해지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문화소비자들은 그 흔적을 찾아 모여든다. 그것을 구태여 깎아내는 것이 과연 이 상권에 호재라고 할 수 있을까.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경리단길의 유행과 젠트리피케이션 이후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올랐던 이태원 상권이 개성 있는 상점의 이사 및 폐점으로 매력을 잃어 공실이 다수 생긴 게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이번 을지OB베어 사태의 경우 임대료 상승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건물주의 단독적인 결정에 의해 상권의 문화적 경험 가치가 하락하리라는 점에선 궤를 같이한다. 앞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를 비난할 수 없다고는 했지만, 그 재산의 가치를 상승시킨 주체 중 하나인 을지OB베어를 재산권의 파트너로 대우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비판할 만하다. 합리적 소통에 의한 조정을 자본의 논리와 행정권력이 대신할 때 세상은 더없이 획일화된다. 하여 이 대립은 일차적으로 건물주와 임차인의 공정한 관계에 대한 문제지만, 더 나아가 시장 논리와 문화적 생활세계의 상생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처럼 거의 대부분 이 대립에선 시장 논리가 문화적 세계를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다. 당장은 자본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모든 문화적 자원을 다 먹어치운 뒤에도 과연 시장은 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의 당연한 행사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단지 그 과정의 끝에 다다른 곳이 지금의 을지로처럼 자발적인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질문하는 것뿐이다. 잊었을지 모르지만, 생맥주를 파는 곳은 을지로 외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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