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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말은 어린이가 듣고 밤말도 어린이가 듣는다

입력 2021.03.27 03:00

수정 2021.03.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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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실시간 비대면 수업을 하며 출석을 부르는데 어느 학생의 모니터에 베이지색 털로 덮인 둥근 등이 보였다. 누구인지 물었더니 학생과 같이 사는 일곱 살 레트리버 강아지로 이름이 ‘동화’라고 했다. 아동문학 수업인데 ‘동화’라는 이름의 청강생을 모시게 되다니, 우연이지만 반가워서 “동화야!”하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벌떡 일어나서 모니터를 초롱초롱 바라보았다. 어려서 안내견 학교에 다녔던 동화는 안내견이 되기에는 너무 흥이 많고 사람을 좋아해서 1차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당시 안내견 교육을 돕던 이 학생 가족의 막내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동화를 모시고 동화 수업을 시작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아동문학 강의여서 ‘동화’는 빈출어휘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낱말이 나올 때마다 동화가 귀를 바짝 세우고 모니터 앞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동화는 용감한 아이가 주인공인데요.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라고 하면 자신도 일어나 다리를 모으고 정자세로 앉았다. 동화가 얼마나 열심히 수업에 집중하는지, 또 얼마나 영리한 강아지인지 알 수 있었다. 수업은 길었고 동화는 가로로 편히 누워서 들었다. 그런 동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약속처럼 수업에서 ‘동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 어린이문학은, 아동문학은…”이라고 그 말만은 피해가면서 조심조심 토론했다. 동화는 눈을 감고도 다 듣고 있었는지 실수로 ‘동화’가 튀어나오려고 하면 몸을 움찔했다. 강의 마지막에는 그의 이름을 포함한 다섯 음절의 문장으로 끝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마이크를 연 뒤 수십 명의 목소리가 “동화야, 안녕!”이라고 했는데 동화가 기뻐하는 모습이 화면 너머로 보였다.

수업을 마친 뒤에 동화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안내견학교 선생님은 생후 7주쯤에 이미 동화가 안내견이 되기 힘든 성격의 강아지일 거라고 짐작했다. 결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녕’도, ‘일어나’도 잘 알아듣는 우리들의 동화는 ‘탈락’이라는 낱말을 모른다. “털 빗자!”는 말을 가장 좋아하고 발에 뭘 묻히는 걸 싫어해서 산책할 때면 꼭 까만 양말을 신는다. 동화가 안내견학교 친구들과 떨어져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좋은 말만 들려주며 키워 온 식구들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좋은 말은 뭘까. 단순한 뜻 너머의 맥락이 중요하다. 동화네 식구들의 소원은 동화가 대학에 가는 것이다. 20세는 되어야 입학이 가능하니까, 동화가 그 나이까지 건강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삼수, 사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동화에게 자주 “대학 가자, 동화야. 삼수하자!”고 말해 준다.

안 듣는 것 같지만 다 듣고 있을, 우리 어린이들 귀에 들리는 소리는 어떨까. 요즘 ‘○린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늘었다. 어떤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 ‘어린이’의 뒷말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 요리를 못하면 ‘요린이’라고 하고 주식 투자 초보자를 ‘주린이’라고 하더니 음주를 놓고 ‘술린이’라 부르는 말까지 나왔다. 한때 아동의 성적 대상화의 맥락이 있어 논란이 됐던 신조어이며 그것이 아니라도 경력이 낮은 사람을 얕잡아보는 느낌으로 많이 쓴다. 이미지 검색창에 특정 음절을 붙인 ‘-린이’를 누르면 아직도 끔찍한 장면과 자막이 줄지어 등장한다. 미디어가 발달한 상황에서 이런 말은 곧바로 어린이의 귀에 닿는다. ‘동화’의 ‘동’만 들려도 귀를 쫑긋 세웠던 강아지 동화처럼 어린이들은 ‘-린이’라고 하면 자신을 반갑게 불러주는 말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모를 평가하고 서열을 가르는 말, 형편을 비웃는 축약어들, 그 밖에 어른에게도 안 되지만 자라는 어린이에게는 더욱 해선 안 되는 다른 말들이 많다. 소리는 존재를 만든다. 낮말은 어린이가 듣고 밤말도 어린이가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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