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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브걸의 역주행을 보며

입력 2021.03.29 03:00

이런저런 사정으로 2년 가까이 거의 매주 SRT, KTX를 탔는데, 그 사이에 꽤나 흥미로운 변화를 경험했다. 전에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큰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면 요즘엔 주로 젊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 번은 앞자리 앉은 사람의 이어폰 볼륨이 너무 커서 신경이 쓰였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싶어 살펴보니 나만 빼고 모두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자기 귀에 빵빵하게 자기만의 것을 듣고 있으니, 누가 큰 소리로 통화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객실에서 통화를 삼가달라는 안내 방송은 들릴 리가 없어 애초에 무용지물이다. 사정은 지하철도 버스도 마찬가지다. 이런 광경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버나드 크릭이라는 정치학자는 정치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정치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치의 공백상태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을 기다린다. 코로나19가 오래 지속되자 전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보다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바라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선호하는 대선 후보들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정당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이것 아니면 저것, 우리 편 아니면 너희 편이라는 이분법으로 정치를 양분했다. 자기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대화와 타협을 말하는 사람은 배신자나 회색분자로 취급했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 때도 있었다. 독재냐 민주냐를 따질 때는 그러했다. 성장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때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다. 정치는 착한 우리 편이 악한 나쁜 놈을 물리치는 동화가 아니다.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정책들 사이에서 더 나은 것,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지금의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이분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당연히 시대착오적이다. 거대 정당들은 물론이고 진보 정당이 보여주는 모습도 거기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정치학자 김원은 ‘장기 80년대’라고 지칭한 바 있는데, 그 피해는 ‘연기된 미래’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진다.

이분법적 정치의 부작용은 요즘 선거판에서 보는 것 같은 ‘막말’이 아니라 ‘정책의 실패’로 나타난다. 박근혜 정부에서 문제는 계파 싸움과 측근들의 지대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정부의 무능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문제는 ‘그들보다는 낫다’는 확신이 가져온 정책 실패에 대한 둔감성이었다. 부동산 정책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공정이 능력주의로 수렴되어 버릴 때, 검찰 개혁이 윤석열 쫓아내기로 변질되어 갈 때,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브브걸의 롤린이 역주행했다. 군인들이 이어폰만 꼽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트와이스, 소녀시대, 레드벨벳이 장악한 이어폰을 브브걸이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겠나. 이 역주행을 보면서 카세트테이프와 CD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엔 곧잘 역주행이 일어났다. 팔고 싶은 노래를 팔자면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노래도 같이 팔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에 저 뒤편에 수록된 노래가 차트의 맨 앞으로 치고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음악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다수의 대중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게 정치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제법 통쾌하기도 하다.

노래 정도는 이어폰을 꼽고 들어도 된다. 그런데 세상은, 특히 정치는 다르다. 이어폰을 빼야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세상에서 자기의 존재를 알게 된다. 늘 같은 노래만 듣고 있는 사람은 항상 그 노래만 흥얼거리면서, 세상 사람들의 취향과 선호가 모두 자기 같은 줄 안다. 코로나19로 그런 증세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정치인들이란 억지로 불려 나간 행사와 경조사에서 어쩔 수 없이 듣기 싫은 말도 듣게 되는 사람들인데, 총선 이후 지난 1년간은 참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값을 치르는 중이다.

정치가 피아의 전쟁이라는 말은 원래 그래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토론이 자취를 감추고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껍데기로 전락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선거기간 중에라도 이어폰을 빼고 국민의 소리를 잘 들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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