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밤 산책을 하던 중 취객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양쪽 손에 아들 하나씩을 달고 있는 나에게 불쑥 다가와 진지하게 충고했다. 딸을 낳아야 한다고.
둘째를 낳고 들어간 산후조리원의 원장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이들어보니 딸을 가진 친구들과 아들만 가진 친구들은 행색도 다르고 늙어가는 모습도 다르다며 딸을 꼭 낳으라고 권했다. 산부인과 의사도 셋째는 꼭 딸을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위로를 건넸다.
여아라는 이유로 임신중지가 일어나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딸이 없으면 서운해하는 정도를 지나 모르는 사람에게도 딸이 없으면 어쩔 거냐고 훈계하는 시대까지 왔으니 이 시대, 이 땅의 딸들은 자긍심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딸이 왜 꼭 있어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보통 이렇다. 이담에 기꺼이 병원에 같이 가줄 존재, 너무 나이들어 보이지 않으면서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줄 존재, 끼니는 잘 챙겼는지 물어봐줄 존재로 딸을 그린다. 딸은 곧 노년의 삶을 돌봐줄 사람이다. 어른들이 상상하는 그 엄친딸의 모습은 슬프게도 이 시대 딸들에게 굴레와도 같다.
한국적 정서에서 자라난 딸들은 엄마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면서 혹은 성별화된 사회의 역할을 수행하며 자연스럽게 돌봄을 본인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어른이 없을 때 당연히 오빠와 동생에게 라면을 끓여주던 소녀는 자라서도 좋은 풍경과 맛있는 음식을 접했을 때 마음 한편에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공통적 정서를 갖게 되었다. 어쩌면 본인도 모르고, 남들은 더더욱 몰라주는 K장녀 혹은 K딸의 현실이다.
양재진, 양재웅 정신과 의사는 본인의 유튜브에서 이 사회의 장남 콤플렉스도 만만치 않지만, 장남들은 대개 의무를 부여받는 만큼 권리와 혜택도 누리는 반면, 장녀들은 책임감에 비해 보상이 없거나 적었기 때문에 장녀 스트레스와 장남 스트레스는 다른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가족 구성원이 점점 단출해질수록 동생을 거두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아들의 부담감은 희석되는 반면, 돌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노령화 사회를 맞닥뜨린 지금 가족 구성원 중에 딸이 있는가는 미래의 돌봄 제공자가 준비되었는가와 같은 중요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기대와 희생적 관계가 버거운 딸들은 더 이상 못하겠다며 괴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아들을 통해 대를 이어가는 가족문화 말고 다른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던 사회가 광적으로 아들에 대한 편애와 집착을 보였다면 가족 내 해결이 아닌 다른 돌봄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회는 다시 딸에 대한 집착으로 방향을 튼 셈이다. 이 점이 ‘그래도 나중에 딸은 있어야지’라는 충고의 본질이다.
안다. 지금의 수많은 딸바보들이 ‘내 딸을 잘 길러 노후를 의탁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냥 존재만으로도 몹시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그냥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너무 예뻐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예쁜 우리의 딸들이 이 관계를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려면, 지금처럼 밝게 웃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딸과 효도와 보살핌이라는 이 기대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딸의 심정으로 정치를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돌봄은 딸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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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희생하는 여성의 상징이던 장녀는, 이제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여전히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민낯을 드러냄과 동시에 권력욕을 숨기지 않는다.https://t.co/1gk2WACzU7
— 플랫 (@flatflat38) April 6,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