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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이날']평범한 우리, '악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나

입력 2021.04.12 00:00

수정 2021.04.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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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유대인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위키백과

유대인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위키백과

■1961년 4월12일 ‘아이히만 재판 마침내 개정’

짙은 회색 양복을 입은 50대 남성이 창백한 얼굴로 법정에 들어섭니다. 뚜벅뚜벅 발소리에 방청객들의 눈가 귀가 모입니다. 여기는 예루살렘의 한 법정, 그리고 그는 이 재판의 피고인입니다. 검은테 안경과 줄무늬 넥타이에 숱이 가는 머리까지, 꼭 평범한 중년 기업인 같은 외모입니다. 푸른 제복 차림의 경비원 두 명 사이에 껴 피고인은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피고석에 입장합니다. 그는 변호사석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습니다. 조금은 긴장한 것도 같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그의 모습에 온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유태인 수백만명을 학살한 최악의 살인마였습니다. 마침내 붙잡힌 악마는 머리에 뿔도 시뻘건 피부도 아닌, 그냥 옆집 아저씨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1961년 4월12일 경향신문은 아이히만을 심판하는 이 ‘세기의 재판’의 개정 소식을 전했습니다.

1961년 4월12일 경향신문

1961년 4월12일 경향신문

아이히만은 1932년 독일 나치당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비밀경찰(게슈타포) 유대인과 과장 등을 지내며 경력을 쌓은 그는 나치 유대인 학살의 실무 최고 책임자가 됩니다. 한때 자신이 ‘유태인 500만명을 열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냈다’고 자랑까지 했다고 합니다.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아이히만은 미군에 포로로 잡혔지만 이듬해에 수용소를 탈출합니다. 독일을 떠난 그는 남미에서 신분을 숨기고 15년을 숨어 살았습니다.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취업까지 하죠. 그러나 독일 검찰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으로 1960년 5월 체포돼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

홀로코스트 주범의 재판을 보기 위해 35개국 기자 600명이 법정에 모였습니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에는 법정에서 오간 말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당시 법정에서 “나는 권한이 거의 없었다. 상급자의 지시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 기계적인 ‘임무 수행’일 뿐이었다는 취지입니다. 그때 ‘뉴요커’ 기자 신분으로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의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나쁜 지시를 생각 없이 따르는 ‘평범함’에 악이 숨어있다는 게 아렌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도는 없었다’라는 아이히만의 거짓말은 시간이 지나며 들통났습니다. 그의 외모는 평범했지만 생각은 ‘악마’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재판 끝에 아이히만은 사형당했습니다. 아렌트가 틀린 걸까요?

글쎄요.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평범함 속에 도사린 악의 정체를 밝힌 아렌트의 통찰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예컨대 지금 미얀마에는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는 군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군경도 있고, 발포 명령을 거부하며 타국으로 도망치는 이들도 있습니다(관련기사▶사격명령 불복종, 국경 넘어 인도로 간 미얀마 경찰... 잡아오라는 군부). 시선을 가까이 돌려 보면, 우리는 문명과 자본의 이기 속에 살아가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늘 우리가 아닌 다른 ‘약한 이들’이 짊어지고 있죠. 내가 속한 시스템이 ‘악’을 계속 생산하고 있는 구조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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