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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 속의 비약

입력 2021.05.01 03:00

봄길 따라 도착한 해차를 마시며
제주 귀양길의 추사를 생각한다
죽음만큼 고통스러운 막다른 길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몸부림
그 절대이율배반서 비약은 나온다

해차가 화개, 보성, 해남으로부터 봄 길 따라 차례로 도착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세 곳에서 보내온 차 모두가 향긋하고 달다. 지난해 봄 해남의 달마산 부도전 아래 20여년 방치된 차밭을 발견하고는 보물을 찾은 듯 기뻐했다. 올봄 그 차밭과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는데 고맙게도 차를 만들어 보내온 것이다. 맛이 깊고 청정했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오래된 절집에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 있다. 부도전이 그런 곳이다. 대개 산사의 초입이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있다. 제자들이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모아, 그 시대 최고의 장인들에게 맡겨 석조물을 조각하고, 수행의 상징인 사리를 안치하고, 행적을 적은 비를 세운 곳이다. 스님들의 무덤 같은 곳인데 나는 그 자리에 서면 어려운 생각들을 뛰어넘고 비약하는 마음을 얻곤 한다. 일반인들의 죽음과 수행자들의 평화로움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지금의 삶에서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동쪽을 원하면서 서쪽을 향해 걷는다면 원하는 삶을 살지도 못하고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공교롭게도 해남 땅을 건너 지금 머무는 곳이 181년 전 추사가 제주 귀양길에서 만난 첫 마을 화북포구이다. “촌 아이놈들 저거 보라고 소리치니/ 귀양길 내 얼굴이 괴상한 점이 많아서구나/ 결국 백번 꺾이고 천번 찍혀 온 곳에는/ 남극성만 은혜처럼 잔잔한 바다 위에 빛나는구나” 화북포구를 지나는 추사의 풍경과 마음을 그대로 잘 드러낸 시다.

지난겨울 ‘세한(歲寒) 평안(平安) <한겨울 지나 봄 오듯>’이라는 제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는 손창근옹이 세한도와 작품 300여점을 기증하면서 이루어졌다. 세한도는 물기 적은 진한 먹을 갈필에 묻혀 거칠게 그렸다. 메마르고 쓸쓸함이 묻어 있는 그림이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장무상망·長毋相忘)는 낙관이 찍혀 있다. 한양에서 제주까지 2000리, 제주성에서 대정현까지는 해안길 160리이다. 한양에서 가장 먼 곳, 제주에서도 가장 먼 곳이 모슬포가 있는 대정현이다. 유배지에서 친구인 초의 스님에게 차와 물품을 부탁하며 편지글 마지막에 쓴 ‘병륵’(병들어 글월을 씁니다)이나 ‘병누’(병든 귀양살이 죄인)라는 명호는 추사의 343개 명호 중 가장 슬픈 명호이다.

천년 동안 비바람에 깎여 부드러워진 부도 조각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그 문양들을 한지에 탁본하게 되었다. 탁본 작업은 어느덧 그 숨결과 조화로움을 느끼는 수행이 되었고, 사라져가는 문양을 되살리는 의무가 되었다.

수년 전 고창 선운사 입구 부도전에서 추사체의 완성본인 백파선사비를 탁본한 일이 있었다. ‘화엄의 종주이며, 대율사이고, 대기대용의 선사이신 백파 스님의 비’라는 비명은 추사 선생이 백파선사 제자에게 선교율의 스승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담아 써준 것이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백파 노인네가 열다섯 가지나 망발을 하였다는 악평을 했다. 추사의 이 부분을 보면서 비약은 절대 이율배반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하곤 했다. 은산철벽과 같은 막다른 골목에서 오히려 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주 귀양살이 9년 동안 아름답고 조화로운 추사체가 완성됐고, 인격도 완성됐음을 본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수행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묻고 또 묻는다면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부딪힌다. 이런 생사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고민하고 몸부림칠 때 절대 이율배반과 절대 긴장이 나온다. 절대 긴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진실한 자기 생명의 치열한 참구가 이루어진다.

지난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탓일까. 차색이 곱고 맛있다. 20여년 동안 큰절을 맡아 분주하게 살다가, 내려놓은 뒤 고요해진 마음 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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